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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해 커져버린 발에 맞는 운동화를 사러가는 것도 귀찮아 하는 너를 위해. 마음에 드는 옷은 빵꾸가 나고 작아져도 못 버리는 너를 위해. 어제 일은 당연히 기억 못하는 너를 위해. 좋은 소리도 두 번 못들어 주는 너를 위해. 어색한 걸 못 참아 인사도 잘 못하는 너를 위해. 머리자르는 것을 싫어해 더벅머리 총각이 되어버린 너를 위해. 부직포 마스크의 질감을 참지 못하고 엄마가 만들어준 여러개의 마스크 중에도 오직 저거 하나만 쓰는 너를 위해. 바느질 하다 찔려 피나는 걸 보고 잠시 후에 다시 와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너를 위해. 만들어진 마스크를 써 보고는 "흘러내리지도 않고 좋네"라고 말하는 너를 위해.
분홍 욕구 막내 사진은 온통 분홍분홍이다. 물려받아 입힌 옷들도 분홍들이고 선물받은 옷도 분홍이 넘친다. 딸이 그렇게 분홍분홍 하더니 7살 넘어 분홍을 싫어하더라며 어렸을 때 하나라도 더 입힐 걸 하며 아쉬워 하는 소리도 들었다. 그래서 이렇게 부지런히도 입혔던가? 중2때 똑단발에 분홍 잠바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는 피해야 할 색깔중 하나가 분홍이다. 그래서였을 수도 있고 남동생이 물려 입어야 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어릴때는 분홍이 많지 않았던 거 같고 오히려 커서 분홍과 하양 줄무늬 남방을 사입기도 하고 결혼 선물로 받은 분홍티도 떨어질때까지 잘 입었다. '욕구'라는 단어 자체가 불편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더 바라지 말아야 한다는 건 목사님 설교뿐이 아닌 부모님의 삶으로 내게 각인된 메세지이..
아픈 손가락 100일을 앞두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크려면 그럴 수 있다 해도 그러기엔 열이 높고 아기가 너무 어려 병원에 갔다. 밤에 열이 많이 나면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준 의사에게 전화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열이 많이 났다. 밤새 못자고 있는 딸이 안타까워 잠깐이라도 눈 붙이라며 아기를 봐주시던 부모님께 고열이 나는 애를 이렇게 돌돌 말아 안고 있으면 어쩌냐고 화를 냈다. 그 밤에 응급실로 달려가지 않고 아침에 병원에 데려오라는 의사의 말을 따랐던 나에게 지금도 화가난다. 병원에선 이것저것 검사를 하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밤을 같이 새서 피곤하신 아빠랑 다시 큰 병원으로 달렸다. 아기가 어리니 일단 입원하자고 하자는데 오늘은 1박에 30만원이 넘는 특실 하나만이 남아있단다. 다른 병원으로 달리자니 아기..
산도 좋다. 지평선을 좋아한다. 2001년 인도의 지평선이 주던 안정감이 더럽고 시끄러운 열차속 그 어스름함을 그리워하게 한다. 수평선은 그다지 안정감을 주지 않는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중년 여자에게 바다는 걸을 수 없는 곳이니... 산은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오를 생각이 없으니.그런데 산도 참 좋았구나! 참 좋았다. 산은 내려다 볼 수 있을 때 좋은 것이었다.
애초에 왜 나는 노트를 쓰는 걸까? 나는 말의 속도가 느리다. 천천히 말하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천천히 말해도 실수를 온전히 피할 수는 없다. 말은 일단 내 입에서 떠나면 상대방의 상황과 형편에 가서 닿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허니 말을 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된다. 내 감정이 내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늘 썼다. 교실에서도 집에서도 썼다. 그날도 노트 한 권을 들고 운동장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썼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알아주면 되니까...'하며 한 바닥을 끄적이고 교실로 돌아갔다. 노트는 써내려가는 동안 나를 가로막지 않아 쓴다. 노트는 나를 불편해하지 않아 쓴다. 노트는 나를 판단하지 않아 쓴다. 노트는 나를 받아주기 때문에 쓴다. 노트는 비밀을 지키기 ..
결국 나. 상황이 되지 않아 참여 할 수 없는 모임이 있었다. 그 때의 마음상태를 따라걸어본다. '이제까지 나와 시간을 보냈으면서도 내가 얼마나 성실한 사람인지 모를 수 있을까? 나는 모임에 진심인 사람인데 내가 못 참석한다는 건 정말 참석할 수 없는 건데..내가 설명한 이유들이 핑계라고 생각할 수 있는거야? 그렇다면 정말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지.' 내 입장에서 서운한 것만 생각하며 나를 옹호하는 자기연민의 늪에 푹 빠져든다. 관계가 개선되기 힘들어 보이는 만큼 깊이 빠져들며 끝까지 가라앉으면 관계를 끝내리라 생각한다. 가만히 늪에 빠져들어가고 있을 때 강한 팔이 나를 꺼내 늪 옆에 앉혀놓는다. 진흙범벅이 되어 있는 내가 나를 향해 비난을 던진다. '그러니까 바보같이 왜 그렇게 생각없이 행동했어? 알아서 잘..
좋은 결정 남들은 결정인지도 알지 못할 결정을 하고는 늘 그랬듯이 마음이 불안하다. 남편에게 그렇게 결정한 이유를 장황하게 나눈 후에 물었다. "잘 한 걸까? 잘 못한 걸까?" "우리가 결과를 알 순 없지. 결국 '좋은 결정'이라는 건 자신이 정하는 거지." 나에게 좋은 결정이란 당연히 원하는 결과를 가져왔을 때만 충족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결과는 '나의 결정'이외에도 많은 환경의 영향을 받게 되어있는 것인데 결과가 좋을 때만 결정을 잘 한 것이니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어제 남편과의 대화를 통해 '결정'이라는 건 결과를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과 태도만을 정하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결정이 잘 될 것인지 잘못될 것인지는 내가 결정할 수 없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에게는 믿음이다.
기꺼이 십 리를 동행하기 #1 햇빛이 쨍쨍한 더운 여름날 친구랑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같이 가고 있었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그 친구의 집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2 친구랑 같은 역에 내려서 친구가 집으로 가고 나서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3 "같이 가자." 는 말에 따라가 다른 일을 하는 친구옆에서 3시간을 보내고 집에 온다. #4 "우리 집에 가자~" 는 말에 따라가다가 중간에 전화받고 "나 약속 생겼어. " 라는 말에 집으로 돌아온다. 나를 돌아보는 중에 생각난 몇 가지 사건들을 아들과 나누었더니 "엄마 완전 호구였네"한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5:41)' 5학년 때(#1) 교회끝나고 학교에서는 나를 모르는 척하는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