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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찾아. 자다 깼다. 엄마를 부르며 울다가 부엌으로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안다는 듯이 계속 걸어갔다. 빨간 불로 바뀐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 자동차들은 불을 켜고 달리고 있다. 자동차들이 빗속을 달리는 것 같이 보이는 건 내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얘야. 너 혼자. 어디 가니?" "엄마 찾으러요." "엄마가 어디 갔는데?" "몰라요" "어머. 너 길을 잃어버렸구나. 경찰서에 데려다줘야겠네. 근데. 아줌마가 지금 교회 가서 예배드려야 하는 시간이라. 너 아줌마 따라 교회 가자. 그리고 내가 경찰서에 데려다줄게." "네" 엄마를 찾아가던 내게 말을 건 모르는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다. 아주머니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처음에는 그 옆에 앉아 ..
어땠을까. 피아노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평소 다니지 않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르겠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서 있다는 걸 가까이 가서야 알아차렸고 움츠러드는 나를 알아보았는지 한 아이가 뒤로 다가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오던 다른 남자아이도 한 번 더 머리를 잡아당기고 도망쳤다. 덩달아 남자아이들을 따라 뛰기 시작했지만 그 아이들을 쫓아간 게 아니라 집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따라온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며 울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우리 집을 따라온 아이들이 있을 거고 내가 집 밖에 나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또 괴롭힐 것이다. 무서웠다. 눈물을 멈추지 않..
무슨 말을.. 써야 할까. 쓰기는 써야 하는데..쓸 수 없어서 쓰지 못하고 있었다... 몇년 동안 중보기도때마다 제일 먼저 이름을 부르던 분이 수요일 아침에 소천하셨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두 아이의 엄마이다. 견딜 수 없는 육체의 고통의 마침표를 찍은 날이리라.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모든 이들을 연결하는 마음의 고통도 이제는 그녀를 괴롭히지 못하리라. 그러나 두 아이가 마음에 고스란히 남는다. 엄마를 잃은 딸과 엄마를 잃은 아들이. 다음날 더 아프고 다음 날 더 입을 닫게 된다. 오늘은 그 아이들의 이름도 되뇌이지 못하겠다. 눈물과 진실의 치유를 간절히 바라며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여야 한다. 그리고 애도해야 한다. 가야 할 길을 보았으니...
슬픔을 쓰는 일 - 정신실 '너만 겪는 일도 아닌데 유난 떨지 마라' 유산을 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낼 때 밖으로부터 받은 메시지이다. 기혼 여성만의 일이기도 했지만 얘기하다 보면 또 그렇게 희소성이 높은 일도 아니기에 공감을 얻기란 더욱 어려웠다. "그래도 지금 셋이나 키우고 있잖아." 이제 그만 좀 하라는 말은 위로인 척 책망을 곁들여 던져진다. 그 시선을 받아들이니 나도 내편을 들어 줄 수 없게 되었다. ' 일어난 사건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사건이 남긴 심리적 외상은 '나 여기 있소'를 끝없이 외친다. 그 외침에 반응해야 한다. 애도가 필요하다. 모든 상실은 애도해야 떠나보낼 수 있다. 남이 잊으라고 해서 그냥 잊혔다면 그것은 잊은 것이 아니다. 반드시 ' 나 여기 있소!' 하고 돌아온다...애도하지 못한 과거는 반드시 ..
덧니. 사이버대학에서 한국어학과 과정 공부를 하고 있다. 모든 수업이 온라인이지만 유일하게 오프라인으로만 가능한 실습과목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온라인 실습의 길이 열렸다. 코로나로 얻은 혜택 중 하나이다. 줌으로 30분 정도 교수님 앞에서 시연해야 하는 수업을 준비하며 혼자서 하루 종일 연습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처럼 학생들에게 발음도 보여주어야 하기에 최대한 카메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하루 종일 연습하며 가장 힘들었던 일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웃을 때 마다 발음을 크게 할 때 마다 보이는 덧니가 그렇게 보기 싫다. 얼마전 글쓰기 모임에서 나는 내 코가 싫다고 썼다. 덧니도 그만큼이나 싫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하나 둘 교정을 시작하는 걸 보며 엄마에..
나도 마찬가지야. 남사친에서 남친이 되던 날엔 서로의 오해가 있었지만 둘 다 싫지 않았던지 우리는 다음 날 만나기로 했다. 덕수궁 까지 가서야 들은 말은 첫 연애가 시작되나 하는 설레임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나는 사실 결혼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야."내 대답은 "나도 마찬가지야.." 였다. 우리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도 마찬가지 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겁이 많은 나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감당할 능력이 내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처럼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24시간을 아빠와 교대로 일하시고 아빠가 신문보며 쉬는 시간에도 밥하고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리셨다. 열 살 부터 외할머니를 도와 아궁이에 불 피워 밥하고 동생들 돌보느라 힘들었던 엄마는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는 것을 인생의 원칙으로 ..
사려 깊은 수다 자기를 아파하는 그에게 아니라고..그렇지 않다고.. 당신은 너무나 빛나고..예쁘기는 물론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얼마만큼 가서 닿을지 알 수 없어도 힘주어 한 글자 한 글자 말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이 넘치려는 순간..그 마음 그대로 나에게 말해주라는 인도를 받았다. 이 마음? 이 충만한 마음? 이렇게 사랑으로 넘치는 말을? 이렇게 따뜻한 말을?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 가야 할 것을 나에게 가져오라는 갑작스런 요청에 멍해졌다. 좋은 선물을 받으면 포장을 뜯는 순간 박스에 붙은 테잎을 떼고 그 안에 선물을 꺼내들어 지문을 남기게 되는 순간까지 고민하게 된다. 두었다가 꼭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이상한 목소리가 내 안에 울린다. 나에게 연결된 값..
내게로 온 선물. connect 라는 단어를 대학을 졸업할 때 까지 몰랐다. 모르고도 대학을 들어가고 졸업했으니 기적이다. 졸업 후 국제세미나에 참석해야 했는데 그 세미나 주제가 connect 여서 외우지 않을 수 없었다. 5박6일동안 진행되던 불편하기만 했던 자리에서 얻은 몇 가지 중 하나다. 대규모 집회나 단톡방 속에서 방황하는, 남편과 세 아이가 집에 있어도 책 속에 들어가면 연결이 끊기는 아내고 엄마다. 그런 나에게 연결이 선물로 왔다. 다른 이가 아닌 나에게 완벽한 시간에 도착했다. 주신 이에게 감사하며 베푸는 이에게 감사하며 준비된 나에게도 고마워하며 누릴 참이다. 감추고 싶은 것을 하나 내어놓고 글을 시작하니 훨씬 편안하다. 이 길에 발을 내딯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