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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수다

읽기 중독


나의 읽기는 3층에 사시던 주인 아주머니가 반지하 우리 집 마당에 버리려했던 어린이 명작 전집을 던져주면서 시작되었다. 출판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빨간 표지에 하드커버였고 지금 외국서적에 쓰이는 가볍고 누런 종이에 타이핑을 친 듯한 글씨체였다. 아마도 주인아주머니가 샀을 때는 비싸게 주고 샀을 듯 하다.

전집을 읽고 또 읽었다. 소공녀, 작은 아씨들 그리고 빨간 머리 앤을 가장 좋아했다. 이 세 권은 몇 번 읽었는지 셀 수 없다. 그렇게 시작된 읽기는 어린 나에게 현실(까맣고 못생긴 나, 공부 못하는 나, 가난한 우리 집)을 벗어날 수 있는 '상상력'을 선물해 주었다. 부록으로 안경도.

그 후 공식은 물론 비공식 취미도 '독서'가 되었다. 부모님 친구분 집에 가도 아이들하고 놀지 않고 책부터 꺼내 앉았고 명절에 큰 집에 가도 나는 책부터 꺼냈다. 세상에 다 읽을 수 없을 만큼 책이 많다고 생각하면 흐뭇하다.

중독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어떤 부작용이 있을 것 같다. 있다. '태백산맥'을 전자책으로 이틀만에 읽고 '토지'를 삼일만에 읽었다. 이 정도면 가족들이 부작용의 피해자이다. 책 읽을 때 주변의 소리가 잘 안들린다. 큰 아이 어릴 때 "혼자 좀 놀아. 엄마 책 좀 읽자"가 주 멘트였다.

시간을 이렇게 흘려보내는 게 맞나 하는 불안함이 올라오면 책을 편다. 전자책을 보기 때문에 휴대폰을 연다. 페이지 넘기는 것보다 속도가 빨라 더 만족스럽다.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현실은 잠시 멈춰진다. 이 느낌 때문에 읽는 것인가. 중독이 맞는 것 같다. 쓰기 시작하면서 조금 나아지고 있다. 서평을 쓰지 않고 다음책을 읽지말자 했더니 읽기가 조금 주춤해졌다.

읽기로 피하기 전에 쓰려고 하는 순간이 나에게는 머무름이 되어 준다. 먹개비처럼 읽기만 하지 말고 내놓기도 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떠나려는 읽기는 손에서 책을 내려 놓으려면 짜증이 나는데 누군가를 위한 읽기, 나를 만나기 위한 읽기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소심한 읽기 중독자는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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