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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버린 꿈 엄마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었다. 그거 시키려면 100만원도 넘게 들거라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을 듣고 오신 엄마가 "너무 비싸서 안될거 같다. 나중에 니가 돈 벌어서 배워라" 고 미안해 하셨다. 매일 가던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미술학원이 있었는데 계단위를 몇 번 올려다 본게 다였다. 한번 올라가 물어볼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끝을 냈다. 그 당시 나의 여러 꿈들 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졌다. 마흔 다섯에 사이버 대학 마지막 학기를 공부하고 있다. 코스대로 끝낸다고 생각하니 기대가 되지 않았다. 다른 과의 수업을 다 돌아보고 설레는 과목만 듣기로 결정했다. 과제를 하다가 문득 그림이 나의 지나갔던 꿈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때와 지금을 계산해 보니 27년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을까. 문구점..
혼자만의 전쟁 둘째는 여느날 처럼 짜증을 내며 일어났고 골라준 긴소매 옷을 보더니 “이걸 입으라고요?” 했다. 반팔을 입고 팔을 감싸고 앉아있길래 추우면 잠바입으라 했더니 오만상을 지으며 건네주는 잠바를 받아 입었다. 나가려고 하는 아이의 뒷머리가 너무 엉클어져 있어 머리를 빗겨주니 짜증으로 온 몸을 떨며 나갔다. 막내 일어나기 전에 강의를 들으려고 모니터를 켰다. 강의가 슬플리 없는데 눈물이 흘러내렸다. 형보다 3년은 빠르게 2차 성징이 시작된 둘째는 5학년에 완연한 사춘기아들이다. 대부분의 대답은 “몰라요”, “상관 없어요”다. 손을 잡으면 빼고 가까이 붙어 걸으려 하면 두 걸음 떨어진다. 큰 아이의 사춘기는 둘째의 사춘기를 대비 하는 백신이 되기에는 너무 약했나 보다. 무방비 상태로 서운하고 서럽다. 막내 태어나..
수치심 - 커트 톰슨[중년에 꼭 만나야 할] 이렇게 읽기 어려운 책이 있었을까? 스무 번 쯤 읽고 나니 드디어 쓸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읽지 않고는 읽어지지 않는 중년에는 꼭 만나야 할 수치심이다. 실은 책의 모든 부분을 옮겨 적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한 구절만 뽑자고 마음을 다잡고 다 잡아서 결국 찾아냈다. 수 많은 구절을 적었다가 다 지우고 하나만 남겼다. '인간을 규정짓는 관계적 모티브는 우리가 가능한 한 열심히, 혹은 적어도 지금 하는 것보다는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것, 혹은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옳음에 관한 것도 아니고 권력의 획득에 관한 것도 아니다. 이 각각의 모티브(그리고 그와 비슷한 다른 비전들)는 수치심의 불안의 계략에 빠져든..
순아 순아. 이름만 남겨 놓고 떠난 순이. 너의 이름을 부르면 나는 언제든 얼마든 울 수가 있어졌단다. 너를 닮은 사람이 니가 있던 곳에서 부르는 찬양을 듣는 오늘 드디어 써내려갈 용기가 생겼어. 너에게 부끄럽고 미안하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일년이 넘었지만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이름뿐일 정도여서. 너는 그냥 보기만 해도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어. 정말 착한 사람. 순박하고 조용하고 말이 없고 맡은 일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해 내는 사람. 그런 너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던 건 다 내 탓이야. 이미 나 먼저 계셨던 두 분의 리더십. 그리고 그 분들께 깊이 연결되어 있어 보였던 너. 안정적이고 충분해 보였던 관계 속에 삐집고 들어갈 마음도 먹지 않았어. 그리고 언제나 조용하게 웃는 너에게 나도 그냥 조용히..
집구석. 아이들이 다시 온라인 수업을 하고 몸이 아프다 보니 집이 엉망진창이다. 그야말로 집구석이다. 한숨쉬듯이 “아. 이 집구석 좀 봐.” 했더니 옆에서 남편은 “왜? 뭐가?” 한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곳이 몸이 피곤하고 예민할 때 참을 수 없이 지저분해 보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는데 문득 사람은 자기가 규칙을 부여하고 그 규칙이 지켜지는 곳에 애정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애정을 느끼는 공간은 어디인가? 라는 생각으로 집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없다. 모든 것이 되는대로 놓여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당장 이 집을 떠나야 하면 무엇이 아쉬울까? 이 집 안에 물건들에는 아쉬움이 없다. 다만 이 집에서 바라보는 뒷집 아보카도 나무와 그 뒷편 산으로 지는 저녁 노을, 창문 밖 히말라야 풍경이 그리울 것..
엄마가 저번에.. 이런 숙제 도와주다가 완전 화 냈었죠. 나 그 기억이나. 그랬니? 미안하다. 아네요. 제 기억에 제가 짜증냈어요. 숙제를 도와달라고 부르고는 이런 대화가 오고 갔다. 그래. 숙제 봐 주다가 화가 올라올 때가 많았다. 별로 기억하는 게 없다는 둘째는 가끔 이렇게 속을 보인다. 그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마음을 내비치는 일이 거의 없는 아이. 서운한 것도 속상한 것도 바라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시원하게 말해 주지 않는 아이가 곁을 내 줄 때 진심어린 말을 건네어 그 손을 잡아야 한다.
주님, 나이 드는 것도 좋군요 -베르나데트 맥카버 스나이더 콧물과 재채기로 띵한 머리와 피곤함으로 일어나 커튼을 여니 하늘이 딱 내 몸이다. 비를 가득 머금어 무거운 회색이다. 꼭 짜서 쨍한 햇빛에 널고 싶은 젖은 솜이불이다. 오래 걸리지 않을 감기로도 색을 잃어버리는 약한 내가 늙어가는 길에 어떤 용기로 설 수 있을까. "그러나 저희 집에 있는 물건은 도무지 자기 '자리'를 모르는 것 같아요." 나 같아서 친근하게 느껴진다. 주차장에서 정신차리라고 소리지른 그 젊은 여자에게 이 책을 한 권 선물하면 어떨까. 거기에서 시작된 책일 거 같은 느낌에. "그래요. 주님. 오늘은 자기 연민이라는 구덩이에 빠졌어요. 게다가 너무 게을러서 빠져나오는 길을 파내지 못하고 있어요. 물론 상황을 바꾸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아요. 어쩌면 저보다 더 외로워하는 ..
우울할 때는 달다구리. 사흘동안 콧물이 나는 막내는 비가오고 날이 추워서 밖에 나가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가리키며 나가자고 하는 아이에게 안된다는 말을 하는데 눈이 너무 슬프다. 우울해 하는 아이의 마음을 잠시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막대사탕 뿐이다. 위상을 높여두기 위해 평소에는 거의 주지 않는 막대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잠시 기분이 좋아진 막내를 보며 달달함에 감사하다.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돌아올 성적표로 우울해지는 나를 달래는 특별레시피가 있었다. 1000원이면 충분했던 간단 레시피인데 가나초콜릿을 중탕해서 녹인다음 소보로 빵위에 가득 발라 먹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돌아올 성적표에 대한 우울함이 조금은 날아가 좋아하던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울함을 달래줄 자기만의 달다구리 레시피 하나 쯤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