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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6th. 땅이 움직인다. 찬양이 끝나고 대표기도가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바닥이 파도처럼 내려갔다 올라온다. 그 위에 얹어져 있던 내 몸은 힘없이 파도타기를 한다. 눈은 떴어도 몸을 세울 수가 없다. 땅은 계속 파도를 타고 겨우 벽을 짚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는데 코끼리 코를 20번쯤 한 후와 같다. 번뜩 애들이 떠올라 미친듯이 이름을 부르며 주일학교예배를 드리던 2층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아무도 없다. 다행히 애들은 이미 밖에 피해있었다. 휘청거리며 내려와 신발을 찾아 신었다. 그리고 몇군데 무너진 곳을 바라보며 다들 넓은 마당에 모여 앉아 예배를 마저 드렸다. 다시한번 땅이 파도를 일으키며 교회 창문들이 떨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와 더불어 바람이 불며 어두워 지던 하늘이 몸을 흔들어 댔다. 집에 돌아와..
집 5th. 가난보단 옹졸함이 부끄럽다. 이 집에 살면서 그런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남편에게 이번 달 생활비를 달라 했더니 300루피 (약 3000원)를 주면서 잘 쓰라고 해서 속상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분명 남편은 기억도 하지 못할 장난을 나 혼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무슨 낭비라도 할까 봐 생활비를 안 준다는 둥 혼자 서운해한 흔적들이 우습다. 당연히 그때는 지금처럼 웃을 수 없던 이유가 있었지만. 애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하면 대신 과일을 먹여야지. 라고 생각했다. 과자도 사고 과일도 살 순 없으니까. 그날도 유치원에서 애들을 데리고 집에 가는 길에 애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했다. 그때 애들이 좋아하던 봉지과자가 한 개에 40루피였으니 두 개 하면 80루피다. 그 돈이면 더 보태서 사과 1kg를 살 수 있으..
보물 일기. 아이들을 위해 써둔 일기장이 있다. 내 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일기이다. 아이들 대신 내가 써둔 일기장. 어렸을 때 일이 궁금해 지는 건 아이를 낳고 나서인 것 같다. 어릴 때 잠 안 자던 둘째를 보며 뒤집지 않고 잘 기어다니지 않던 셋째를 보며 누굴 닮았나. 내가 그랬나. 이런 것들은 애를 낳고 나서야 궁금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 나이가 되어 엄마에게 물어보면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리고 만약. 아이들이 물어보고 싶을 때 내가 없다면 영원한 비밀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만이 아닌 건 택이 아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택이가 큰 대회에서 우승하며 택이 아빠가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기자가 태몽이며 태어난 시를 물어본다. 아무대답도 못하는 아빠는 엄마가 없는 아..
나는 그냥 엄마다. 미운 세 살, 거친 말이 들어가는 일곱 살, 그리고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 때 한 번 씩 겪는 고비들인데 실은 나는 유행처럼 하는 말들은 믿지도 않고 잘 쓰지도 않는 편이다. 그런데 살아오고 보니 그 단어들은 지혜가 주는 경고 같은 것이다. 세 살, 일곱 살이 그리고 사춘기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수식어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만큼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를 요구당하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 힘들고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갓난아이는 자기의 생명을 부모에게 맡긴다. 처음에는 내가 이 생명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도 느끼지만 어느 순간 익숙해지면 그 생명에 대한 모든 결정이 내 것인 양 느껴진다. 내가 옷을 입히고 내가 먹이고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당연해질 때쯤 아이는 이제는 자기도 이 결정들..
불안 일기 노트북을 손에 들고 문을 열었는데 셋째가 갑자기 뛰어나가다 넘어져 얼굴을 바닥에 부딪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잠시 후에는 유모차에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모차가 뒤집어지며 아이를 덮쳤다. 소스라쳐 일어났더니 꿈이다. 외출의 자유가 자유인지 알 지 못했을 지난달에 막내만 데리고 외출할 일이 있었다. 내가 잡은 약속이었고 의미가 충분한 모임이었다. 그런데도 전날 밤 나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수영장에서 일렁이던 물이 갑자기 살아나서 내 옆에 서있던 막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 바로 알아챘다. 아이와 단 둘이 하는 외출이 불안했던 것이다. 아무 일 없는 날에도 불안하고 외출할 일이 있는 날은 더 불안하다. 불안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 다칠까, 넘어질까, 혹시라도 어떻게 될까 봐 애지중지 하는 마음은 어느 ..
나는 괜찮아. 아침에 큰 아이가 부엌에 와서 의자에 앉았는데 우찌끈 쿵 하며 의자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 보니 아이가 일어나면서 “엄마 나는 괜찮아.” 한다. 싸서 비지떡인 듯한 의자는 바닥에 접힌 것처럼 붙어있었다. “안 놀랐어? 안 다쳤어?” 되물었더니 괜찮다고 한다. 소동이 지나가고 큰 아이는 자기 일을 하러 갔다. 마음 한편이 찡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에겐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우리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증거이다. 큰 아이는 유치원을 한국에서 다닌 적이 있다. 아이가 집에 도착하고 선생님께 전화가 왔는데 오늘 유치원에서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아이가 서랍을 열다가 손잡이가 빠졌는데 그 서랍은 원래 낡아서 그런일이 자주 있으니 괜찮다고 달래주셨는데도 전혀 진정되지 ..
Happy new year & day!!! 우리 집은 큰길에 있어서 창을 열면 길거리 풍경이 다 보이는데 어제저녁 즈음에 봉쇄 시작하고 거의 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있는 것을 보았다. 야채를 파는 손수레에 모두 마스크를 하고는 있었지만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식료품 상점들에도 쉴 새 없이 사람이 다녀갔다. 남편에게 “다들 봉쇄가 너무 길어져서 힘든지 많이도 나와다 닌다” 했더니 “ 내일이 새해잖아.” 맞다. 여기는 오늘 2077년 새해를 맞았다. 달력도 숫자도 날짜도 그 고유함을 지키는 것에 큰 의미를 둔다. 코로나로 인해 더욱 강력히 깨닫게 되었지만 세상이 정말 하나인 것 같이 느껴지는 이 시대에 또 아주 외 길로만 갈 수는 없으니 둘 다 사용하는 편이다. 그래서 1월1일도 새해로 즐기고 매년 달라지지만 4월 중순..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 아무도 묻지 않을 때 나는 안다. 누군가가 물어와 설명을 하려고 하면 모른다' -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 이 글을 인용하는 거면 참 좋겠는데 여의치 않아 그냥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가져왔다. '시간'에 대해 정의하는 고충을 표현했다 한다. 어찌나 맞는 말인지. 나는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려니 모르겠다. 어디서 조금 막힌다 정도가 아니라 그냥 아예 모르겠다. 봉쇄 19일째 아이들에게 어느정도 자유롭게 노트북사용을 허락해주었다. 방학이라 기대도 있었을텐데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다. 그런데 큰 아이는 게임을 하다가 뭐가 잘 안 된다고 한숨을 쉬며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며칠 전 부터 이어진 짜증에 물었다. 게임을 재밌으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