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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나

집 7th.

쉼도 삶의 부분임을 인정한 시간.

 

 

 

 

깊은 잠을 샘내듯 가끔 흔들어 주는 여진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일상이 돌아왔고 무너져 내린 담장들과 금이 간 건물들만이 지진이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시 이사가 찾아왔다.

 

 

지진이 조금 잠잠해지자마자 매번 은행에서 오는 거다 친구가 구경 오는 거다 라며 낯선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보게 하던 주인 할아버지 부부가 큰 지진을 겪고 심신이 미약해지신 이유로 집을 팔고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하시기로 드디어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많은 집들이 지진에 의해 금이 가거나 파손이 되어 수리가 필요했고 또 아파트나 시내에 살던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원했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일이 어려웠다. 애써 구한 집에 계약을 하겠다고 전하면 가격을 다시 올리거나 집주인이 살기로 했다며 한 달이 지나도 집이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던 곳에서 점점 멀리 집을 구하러 다니게 되던 중 마침내 집을 구하고 이제는 짐을 싸야 했다.

 

 마음을 멈춰두고 몸을 계속 움직여야 했다. 닥치는 일들을 계속 처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지진 후 두 달만에 새 집에서 짐을 풀어야 하는데 겨우 이부자리만 정리해두고 나서부터는 그 박스들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졌다. 몸이 피곤한 것은 물론이었지만 마음이 이제는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어려운 시간을 지냈지만 나 혼자 겪은 일이 아니었고 '트라우마' 라는 단어도 알게 되었지만 내 일상은 너무 바빴고 나를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다행히 아이들이 괜찮았기에 더 미적거렸던 것 같다. 예전 같으면 이사하고 나서 밤잠도 반납하고 짐을 정리해대던 내가 일 주가 지나고 이 주가 지나도 박스들을 풀지 못하는 걸 보며 남편이 결정을 내렸다. 그래서 집을 나섰다.

 

어려운 일일수록 더 힘을 내 이겨내는 것에 집중했다. 버티는 게 익숙했다. 쉬었다 돌아와도 문제는 그대로 라고 생각했다. 타인에게는 쉼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지원하면서도 내게는 인색했다. 쉼의 가치를 아는 척했지만 사실은 몰랐던 것이다. 집을 떠나니 그제서야 링 위에 선수같이 경직되고 긴장되었던 몸의 근육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들이 위태로워질까 꼭 꼭 싸매 두었던 마음 안에 근심과 걱정들도 분위기를 읽었는지 하나 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그렇게 하루를 쉬는 동안 아이들보다도 나에게 너무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 회복하는 몸과 마음을 보았다. 종목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삿짐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짓누르던 무거움이 사라졌다.

 

아무런 프로그램없이 다만 하루를 떠났다 돌아왔을 뿐인데 보이지 않던 힘이 생겨났다.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일 수 없던 감정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손잡이를 잡았다고나 할까. 여하튼 하루 만에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기보다 붙잡고 자리를 잡고 앉아서 여행을 계속할 준비가 된 것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약간은 무시했던 쉼에게 깜짝 놀랄 만큼의 선물을 받고 돌아온 일상에서 갑자기 정리의 달인이 될 수는 없었지만 평소에 하던 정도의 정리정돈을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다. 박스가 하나씩 비워지고 내 마음도 그 집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고 놓였다. 

 

그러나 복병은 늘 있었으니 집 바로 앞에 신전에서 (무너진 지붕을 철판으로 막아두어서 신전이 있는 줄을 몰랐다.) 24시간 일주일간 스피커에서(모임에 오지 않은 신자들을 배려해 온 동네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기도문을 외는 주문 같은 소리에 정말 멘붕이 왔다. 더워도 창문을 열 수 없고 잠을 잘 때도 그 주문이 귓가에 맴돌았다. 밥 먹을 시간만 잠깐 쉬어주며 쉼 없이 계속되는 소음공해에 대고 외치고 싶었다. 여기 사람이 산다고 잠도 자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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