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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4th. 이 집에서 나는 아주 힘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일단은 이 집에서 내가 겪은 일들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 하나만 적기로 한다. 둘째가 될 뻔했던 아기를 잃었다. 남들이 쉽게 말하는 유산. 정말 어이없이 그냥 '유산'이라고 한다. 많은 엄마들이 경험한 일이라 그래서 그런건가. 어느 날 갑자기 둘째를 낳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 있는데 그 때였다. 본능인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선명한 두 줄로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너무 기뻤는데 다음날 부터 갈색혈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이 불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곤 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에 안심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더니 며칠이 지나도 멈추지를 않..
싱크로율 99.99% 1. 그러니까 형아. 내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잖아.하하하. 둘째가 말하길래 깜짝 놀라 물었다. 너가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아. 우와. 알지. 왜 몰라. 효니야. 등잔이 뭐야? 몰라. 2. 아들이 만화 주인공같은 목소리를 흉내내며 떠들길래 "엄마도 어렸을 때 성우하고 싶었는데.." "엄마 나도 나도 성우 하고싶어" "나니. 성우가 뭐하는 사람인지 알아?" "아니 몰라" 형제의 싱크로율 99.99%다. 기질도 다르고 성향도 다르고 선호도 다르고 체질도 다르고 여튼 다 다른데 둘째가 한 말이 너무 재밌어서 적어두었었는데 예전에 큰 애도 똑같은 일이 있었던 걸 찾았다. 적어두길 참 잘했다.
집. 3rd. 이 집을 구하게 된 건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집을 구한다는 걸 아는 언니가 브로커(알음알음 번호를 구해야 하는 부동산 중개인)도 소개해주시고 집도 같이 보러 다녀주셨다.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날 집을 보러 브로커를 따라갔는데 도착한 집이 바로 그 집이었다. 아이를 안고 업고 재우며 창문으로 보던 회색 집. 우리 집에서 매일 보던 그 집이었다. 친근함 때문이었을까. 아주 큰 세퍼트와 더 무섭게 짖어대는 제페니즈 스피츠가 있었는데도 그 집으로 결정했다. 지은지가 2년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외국인에게 집을 주려고 비워놓은 1층이었는데 이게 함정이었다. 아끼는 집에 예민하신 주인 아주머니는 주로 마당 텃밭에서 시간을 보내셨는데 커튼이 열려있을 때 보셨는지 집 안에 신발장을 놓는 일에도 잔소리를..
집. 2nd. 글을 쓰니 좀 가벼워진다. 기억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 많이 무거웠던 것이다. 두 번째 집은 벽이 하얀 집이었다. 여기는 집 안팎을 페인트로 칠하기 때문에 색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큰 애는 여기서 낳았다. 아이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네팔리라고 놀린다고 한다. 네팔아이들이 한국애를 네팔아이라고 놀린다는거다. 겁 많고 소심한 내가 여기서 출산을 하다니. 그건 정말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는 고통은 내가 오롯이 겪어내야 하는 것이니 한국이건 어디건 그 고통의 크기는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다. 주변에 여기서 아이를 낳고 한국에서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여기서 출산하신 분이 계시다. 대단하신 분이다. 출산의 고통을 의술..
집. 1st. 2005년 이곳에 오고부터 열 번의 이사를 했다. 저마다에 깃든 추억을 기억이 선명할 때 남겨보고자 한다. 그 발자취가 또한 나의 역사이니. 더불어 기억의 무게도 덜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집. 처음에 와서는 선임 선생님의 집에 묵게 되어있었다. 학교 근처에 있던 집인데 학교보다 오 분쯤 더 아래로 내려갔어야 하는 집이었다. 핑크와 파랑의 강렬한 대비가 기억에 남는 집이었다. 비어있던 집에 들어갔고 본인 침대만 빼고 모든 것을 사용해도 된다고 하셔서 일단 침대만 주문했다. 수공으로 직접 만드는 더블 침대 가격이 2만 9천 원이었다. 집주인이 유명한 이불집 사장이었는데 부인과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고, 우리 집은 3층이었다. 방 1개 거실 1개 부엌 1개. 그중에 방 한 개에 선임 선생님의 침대와 옷장이 ..
오랜만에 반가워. 남사친이던 남편과 처음 둘만 만나게 된 건 어느날 내가 탁 트인 곳에 가고 싶다고 했고 남편이 올림픽공원을 가자고 한 날이다. 답답했던 그 날 난 정말 탁 트인 곳에서 하늘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완벽했다. 서울에서 돈 많이 안 들이고 빌딩에 가려지지 않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곳. 눈을 감지 않아도 나는 그 하늘 아래 있는 것 같다. 그날의 하늘은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넓어지고 깊어지면 나처럼 평안하고 고요할 수 있을 거라고. 우리는 많은 일들을 지나 여기에 왔다. 하늘이 아름다워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지만 하늘이 너무 맑아서 이곳에 잘 왔다고 생각했다. 십여년 전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매일 마주했었는데 길이 넓어지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많이 다니기 시작하고 먼지와 매연이 날리..
내일의 나에게 주는 선물. 생애 첫 블로그를 만들 때 이름을 써넣는 창 앞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썼다.'쓰다 보면 알게 되겠지.'볼 때마다 너무 마음에 든다. 딱 내 마음이라.. 무엇을 알게 된다는 것일까. 아니 무엇을 알고 싶다는 것인가.나에게 묻는다. 읽는다는 것은 내겐 휴식과도 같은 것이다.읽고 있으면 참 좋다. 말씀을 읽고 책을 읽고 뉴스를 읽고 여러 가지 글을 읽는다. 큰 아이에게 자주 했던 미안한 말이 " 엄마 책 좀 보자."였다. 그때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고, 지금은 미안하다. 낯선 곳에서 처음 해보는 육아에 지쳐 잠시라도 틈이 나면 무언가를 읽으며 쉬고 싶었다.지금도 막내가 낮잠이 들면 나는 책을 든다. 그런데 며칠 전 블로그를 열고 글 쓰기를 시작하고 부터는 막내가 잠이 들면 글을 쓴다. 실은 글을 쓰는 것도 늘 ..
슬픈 사랑은 여기까지. 마흔에 낳은 셋째딸은 사랑, 그 자체이다. 볼을 부비면 나는 침냄새는 세상 그 어떤 향수보다 향기롭고, 깔깔대는 웃음소리는 세상 모든 행복을 내게로 가져다준다. 끌어안고 콧등을 서로 비비며 웃으면 나는 벅차오른다. 그 행복한 순간에 나는 눈물이 툭 떨어질것 같은 슬픔에 당황한다. 정말 울기도 했었다. 몇번 그런 감정에 놀라 생각해보았다. 왜 슬픈 것인가. 큰 아이는 11년 작은 아이는 7년 더 일찍 내게 왔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은 그 보다 짧다.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시간이 짧다는 것 때문이었다. 세상의 무서운 기사들을 접할 때. 여전히 여성들에겐 공평지 않은 사회를 만날때. 희생을 당연히 요구받는 여성들의 외침을 들을 때. 나는 너무 두렵고 너무 미안하다. 엄마로써. 여자로써. 아직 말을 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