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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것 계속 하기.




그 동안의 내가 어떤지 쓰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저 화분에 씨앗을 심기 전부터 생각했어도 알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오늘 어느정도 알게 되었다.



자! 나는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내 마음 속 이곳은 지구의 중심에서 멀찍이 떨어져있어 중력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공기의 저항도 느낄 수 없을만큼 아주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중 인것만 알 뿐 떨어짐으로 인한 고통은 거의 없다.



어릴 적에 집에 도둑이 든 적이 있다. 이모의 결혼 준비로 이모와 엄마가 외출한 사이에 나는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왔다. 자물쇠가 잠겨있는 걸 보고는 바로 친구 집에 가서 놀았다. 놀다가 틈틈히 엄마가 왔는지 집에 가 보곤 했다. 우리 집은 반지하여서 집 까지 내려가지 않고 계단 위에서 빼꼼 보고는 자물쇠가 있으면 다시 가서 놀았다. 그렇게 두 세번 가 봤는데 마침내 문이 열려있었다. 다시 친구 집에가서 친구네 엄마한테 인사하고 가방을 가지고 집에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집의 모든 물건들이 바닥에 내팽겨쳐져 있었다. 엄마를 부르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엄마가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초등학생인 나는 엄마가 뭘 찾다가 잠깐 나갔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현관 바로 옆에 주방칼이 놓여 있었다. 바로 엄마랑 이모가 와서 도둑이 들었다고 했고 결혼 준비를 위해 집에 둔 돈은 다행히 그대로였으나 분명히 아는 사람이 한 일이라고들 하셨다. 일 주일 후 쯤 도둑이 한 번 더 들었다. 그 때는 거의 뒤지지 못했고 아빠가 연탄 집게로 열쇠가 아니라 열쇠고리를 끊어버리는 도둑의 수법을 읽고 세상 강력한 열쇠고리로 교체해버리시는 바람에 그런 일은 다시 없었다.


당시에 나는 어렸고 그 날 무서워서 잠을 못 잤다든지 하는 기억은 전혀 없다. 사실 그 자체가 잊혀져 있었다. 어른이 된 어느 날 기억이 살아났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는 전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계단 아래를 빼꼼히 보고 가는 작은 내가 보이고 현관을 열면 바로 보이는 부엌의 모습, 열려져 있는 찬장에서 쏟아져 있는 그릇들, 안방 창문 밑에 있던 전부 열려져 있던 서랍, 이불이며 옷가지를 다 토해낸 장롱,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집안에 모든 물건들이 생생하다. 그리고 마지막 그 칼. 나 혼자 조금 더 일찍 집에 들어갔다면. 도둑을 마주쳤다면. 어른이 되어서야 할 수 있는 생각들이 더해져서 공포감은 극대화 된다. 다 지나버린 일이 지나가지 않고 있다.


어제 밤에 장대비가 내렸다. 비가 오는 날 도둑이 잘 든다는 이야기가 생각났고 다시 그 때가 떠올랐다. 그래서 내가 떨어지고 있는 중인 것을 알았다. 불안이 스며들고 있는 중에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 중력과 공기의 저항이 없는 곳에서 바닥에 닿기 전에는 떨어지고 있는 지 알 길이 없듯이 말이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생각하고 그 상황에 대비하고 대책을 세워둘 수 있다. 불안은 생명을 보호하고 안전을 유지하는데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 인간이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에어백이나 구명조끼는 개발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말하는 건 '그 후의 불안'이다. 그 후의 불안은 안정을 거부하는 불안이다. 불안을 찾아내는 불안이다. 그 후의 불안은 외로운 싸움이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결국 불안을 움켜진 손을 놓아야 하는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다.


화분을 보다 알았다. 나는 화분에 씨앗을 심고 흙을 덮을 수 있다. 적당한 물을 주고 햇빛이 드는 곳에 화분을 둘 수도 있다. 여기까지이다. 씨앗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우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붙잡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불안을 집채만큼 키우는 일은 내가 즐겨하고 잘하고 늘 해오던 일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계속해서 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 후의 불안'은 장악력이 강해서 뭔가 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지 않지만 '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가 불안이 나 같은 사람들을 겨냥하는 메세지이다. 이 일을 했다가. 그 말을 했다가. 일어나는 일은 어떻게 책임 질 것이냐며 추궁한다.


여기까지는 왔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려 한다. 화분에 계속 물을 준다. 공부를 시작한다. 블로그에 계속 글을 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다 보면 '그 후의 불안'의 노예로 살며 떨궈진 안정감을 줍고 있기 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자유가 경험하는 현기증으로서의 불안'을 만나게 될 것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