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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엄마다.

나는 그냥 엄마다.




미운 세 살, 거친 말이 들어가는 일곱 살, 그리고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 때 한 번 씩 겪는 고비들인데 실은 나는 유행처럼 하는 말들은 믿지도 않고 잘 쓰지도 않는 편이다. 그런데 살아오고 보니 그 단어들은 지혜가 주는 경고 같은 것이다. 세 살, 일곱 살이 그리고 사춘기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수식어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만큼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를 요구당하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 힘들고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갓난아이는 자기의 생명을 부모에게 맡긴다. 처음에는 내가 이 생명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도 느끼지만 어느 순간 익숙해지면 그 생명에 대한 모든 결정이 내 것인 양 느껴진다. 내가 옷을 입히고 내가 먹이고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당연해질 때쯤 아이는 이제는 자기도 이 결정들에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자기의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는 단계들이 그 나이쯤 인 것 같다. 



그대들의 아이라고 해서 그대들의 아이는 아닌 것.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는 삶의 딸이며 아들인것.
예언자 , 칼릴 지브란



우리 아이들은 둘 다 조금 느린 건지 (더하기 세 살 해서 ) 10살이 제일 어려운 시간인 거 같다. 요즘 큰 아이는 나한테 "엄마. 현이는 지금이 사춘기인가 봐. 왜 저렇게 말을 안 듣지." 하며 고개를 흔든다. 그 말을 들으니 큰 아이 10살 즈음에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기억이 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할 때마다 10살이 된 큰 아이는 동생이 먼저 욕실에 들어갔다던지 동생 잠옷을 먼저 갈아입혀주었다는 이유들로 짜증을 많이 내곤 했다. 받아 줄 에너지가 남아있던 날에야 "그랬어.. 그래서 속상했구나.." 했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날에는 "너는 10살이나 되었는데.. 다 큰 애가.."라는 말이 안 나올 리 없었다. 



짜증내고 혼나고 울다 잠든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면 죄책감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렇다고 그 날이 마지막 일리 없었다. 어느 날은 피곤한 몸에도 잠을 못 자 뒤척이다 새벽을 맞이하고 어느 날에는 울다 잠든 아이를 보다가 일기를 쓰고는 했다. 세상에 나같이 나쁜 엄마가 또 있을까 싶은 날이 며칠 씩 이어지면 내가 이 아이들을 키우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키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나 같은 '나쁜 엄마'말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있고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아무리 아이들이 짜증을 내더라도 다 받아줄 수 있는 '좋은 엄마'가 내 아이들을 키우면 훨씬 행복하게 자라날 것 같았다. 


'뉘우침에는 힘이 없다. 뉘우치는 시간 동안 그렇게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다시 또 반복하는 것을 보면 뉘우침에는 아무 힘이 없다. 오히려 홀로 뉘우쳤다는 생각. 충분히 반성했다는 만족감으로 나의 죄과를 이미 치른 것이 된다. 나는 스스로 충분히 괴로워했으니 되었다. 그래도 나는 이런 죄책감은 느끼는 사람이니 하는 우월감을 느낀다. 뉘우치지 말자. 뉘우치고도 다시 저지른 실수에 또 뉘우치다가 진저리 나는 날.' 2014. 3월.





헤어 나올 방법을 알 수 없어,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어둡던 시간들이 지나가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엄마'라는 단어에서 수식어를 빼기로 했다. 나와 비슷하게 육아로 고민하는 동생들에게 어느샌가 그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엄마는 너 하나야. 좋은 엄마 나쁜 엄마가 아닌 '엄마'야. 너 만 '엄마'야. 그리고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건 '엄마'라고. 여러 번 말하다 보니 깨달아졌고 받아들여졌다. 양극단을 제외한 평범에 속하는 나는 그냥 '엄마'가 되기로 하는 방법밖에 없다. 내가 이 아이의 유일한 '엄마'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엄마'가 되는 것이다. 그래야 아이들도 좋은 아들이나 나쁜 아들이 아니라 그저 '아들'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고비가 올때마다 함께 다른 모양으로 넘어가며 여기까지 왔다. 이제 나보다 키가 커버린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살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내 아들이지만 내 아들이 아닐 것 같은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고 지혜가 알려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엄마를 소개할 때 " 우리 좋은 엄마예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 엄마예요"라고 한다. 내가 어떤 엄마인지는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나를 거쳐 왔을 뿐 나에게서 온 것이 아닌 나의 아이들에게 들어야 할 이야기로 남겨져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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