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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엄마다.

불안 일기



노트북을 손에 들고 문을 열었는데 셋째가 갑자기 뛰어나가다 넘어져 얼굴을 바닥에 부딪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잠시 후에는 유모차에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모차가 뒤집어지며 아이를 덮쳤다. 소스라쳐 일어났더니 꿈이다.


외출의 자유가 자유인지 알 지 못했을 지난달에 막내만 데리고 외출할 일이 있었다. 내가 잡은 약속이었고 의미가 충분한 모임이었다. 그런데도 전날 밤 나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수영장에서 일렁이던 물이 갑자기 살아나서 내 옆에 서있던 막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 바로 알아챘다. 아이와 단 둘이 하는 외출이 불안했던 것이다.


아무 일 없는 날에도 불안하고 외출할 일이 있는 날은 더 불안하다. 불안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 다칠까, 넘어질까, 혹시라도 어떻게 될까 봐 애지중지 하는 마음은 어느 부모에게나 마찬가지이다. 꿈까지 꾸는 일도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더욱 불안하다.


한 돌이 조금 지나고 한국을 방문했던 큰 아이가 시댁에서 커져있는지 몰랐던 무선다리미에 손을 데었다. 운동화를 신은 채로 집안에 뛰어들어간 아이를 붙잡아 운동화를 벗겨 현관에 놓자마자 자지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는 아이를 그대로 받아 들고 싱크대에서 손을 붙잡고 물을 틀었다. 내 눈 앞에서 작은 손이 두배로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뒤에서 식구들이 난리가 났지만, 나는 계속 아이의 손만 보고 있었다. 부어오른 손이 회색빛을 띄기 시작했다. 전화로 급하게 부른 내 동생이 차를 타고 왔고, 아이를 안고 근처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화상전문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응급처치만 해주겠다 했다. 자세한 검사를 해보지도 않은 응급실에서 증상만 보고 손을 못쓰게 될 수도 있단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아이만 바라봤다.


법이 허용하는 최고의 속력으로 강남에 있는 소아화상전문병원을 향해 갔다. 화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 저 손 안에서 계속 진행이 되고 있는 중이라했다. 그 진행이 멈추어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고, 진행되고 있는 화상을 진정시킬 수 있는 최대한의 조치를 해 주었으니 집에 갔다 내일 다시 오라고 했다.


울다 지쳐 잠든 작은 체구를 누이고 나는 옆방으로 들어갔다. 아무하고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릎을 꿇었고, 불을 켜지 않은 방에서 드디어 울기 시작했다. 나의 울음은 깊이 눌려졌던 만큼 강하게 튀어 올라왔다. 잠든 아이를 깨우지 않을 정도로 새어 나오는 신음에 절망과 고통이 자기 자리를 요구했지만 나는 그것들에게 틈을 줄 여력이 없었다. 제발. 아이의 손을 움직이게만 해 주시기를. 손을 쓸 수 있게만 해 주시기를. 절망이 내 몸을 땅 밑으로 묻어버리려고 했고 고통이 나를 비웃었다. 그래도 나는 그것들에게 내 간구를 양보할 수 없었다. 나는 몸부림치며 구했고 어둠은 깊었다. 잠이 들었었는지 깨었는지 꿈인지 알 수 없는 모든 시간에 울었다. 이 울음이 이제 까지 살았던 날들 중에 가장 슬픈 울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 아들의 화상입은 손이 그의 아들 손의 못자국보다 아프다는 것을 인정했다.


다음날 병원에 갔고 3도화상 진단을 받았다. 치료를 시작하기도 전 의사는 신경이 손상되었으면 손을 쓸 수 없을 거라는 당연한 소리로 내 마음을 도려내 자기 방어막으로 썼다. 그 후로 한 달 동안 계속된 치료라는 것은 실핏줄이 비칠 정도로 얇게 내려앉은 살가죽을 다 뜯어내 다시 피가 철철 흐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비명을 들은 날은 나도 정신이 나가버릴 정도였으니 아이가 엑스레이도 맨 정신으로 찍을 수 없을 만큼 병원을 무서워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끔찍한 시간은 지나가고 붕대로 감아둔 손가락들이 움직이는 걸 보며 희망을 품었고 아이의 손가락들은 살아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이용하는 것이 그런 것이겠지. 손이 움직이는 애를 보면서도 끝까지 손을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을거라는 말은 하지 않으며 나중에 어떻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자극해 60여만 원의 약들과 장갑을 사게 했으나 엄마는 손주를 위해 기꺼이 지불하셨다. 그나마 선크림이라도 안 사게 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그날의 고통이 흐릿해 질 수 있었던 건 아이의 손이 잘 움직이고 시간이 지나 서일 것이다. 지금은 가끔 생각이 나지만 떠오르면 머리속에 눈이 달린 것처럼 현관으로 향하고 있는 나에게 방 안 풍경이 보인다. 아이를 잡을 수 있을 것처럼 선명한 그 장면이 덧없다.


이건 모든 사건들의 시작일 뿐이다. 남편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고 나는 둘째를 낳기위해 한국에 있던 막달에 아이는 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응급수술이냐 깁스냐를 두고 세 군데 병원을 돌다가 깁스를 하기로 했는데 깁스를 풀기 전날 저녁 양수가 터져 산부인과에 입원했다. 혼자 애를 낳을 자신이 없어 병원에 전화해 며칠만 예약 날짜를 미루어 달랬더니 한 달 뒤에 와서 깁스를 풀라는 것이다. 할 수 없어 나는 혼자 애를 낳고 부모님이 아이를 데리고 깁스를 풀러 가셨다. 혼자는 엑스레이도 수면유도제를 먹고 찍어야 하는 아이를 엄마도 없이 감당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 넓은 가족분만실에서 "저기요"를 외쳐대며 혼자 애를 낳았다. 애를 낳고도 병실에 올려줄 사람이 없어 누워 있으니 간호사가 옮겨주겠다고 해 휠체어에 앉아 엘리베이터 앞에 있는데 문이 열리니 깁스를 뺀 아들이었다.


4학년에 네팔에서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바로 위에 다쳤던 그 왼쪽 팔꿈치를 다쳤고 이번엔 수술을 하게 되었다. 이번엔 두 세명의 의사가 모두 수술 밖에 답이 없다고 했다. 한국을 가느냐 네팔에서 수술을 하느냐의 기로에서 네팔 의사들을 믿어보기로 했다. 전신마취를 기다리는 아이를 달래며 마취과 의사에게 아이가 어리니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의사는 특유의 유머로 아이들만 잘 보면 되냐며 어른 아이 다 잘 봐야지 해가며 웃음을 지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아이에게 말을 걸고 아이가 눈을 뜨자 봤지 하며 엄지를 치켜들고 나를 안심시킨다. 수술은 정말 잘 마쳤는데 수술 후 상처부위 드레싱을 해주지 않아 염증이 생겼다. 허나 여기선 수술만 잘 되었음 된다. 흉터는 노 프라블럼.


그 사이사이 있던 사고들까지 쓰기에는 무리가 있어 큰거 세 개만 쓴다. 아이가 어려서도 그랬고 처음이라서도 그랬고 위험한 사고 여서도 가장 힘들었고 나머지 두 개는 아이가 크고 말도 통하고 해서 조금 덜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 모든 사건들은 내 인생의 나이테로 깊이 새겨져 있다. 만삭의 임산부로 수면유도제를 먹인 아이를 등에 업고 엑스레이와 초음파를 찍기 위해 병원 복도를 헤매던 시간들도.


꿈에서 깨어 내 마음을 헤아리고 ‘나는 불안한 사람이다' 라고 쓰고 물끄러미 바라보니 그 불안함이 얼른 벗어던져버리고 싶은 허물이 아니라 잠깐 시간을 내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불안하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까지 애써 불안하지 않은 척해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불안할 때 그저 ‘불안하네'라고 중얼거리고 나면 물에 젖은 솜을 급히 끌고 가느라 지치기보다 햇볕에 말려두고 어느 정도 마를 때까지 기다리며 차 한 잔 할 줄 아는 지혜도 더해지고 있는 중인 것 같다. 턱밑까지 불안이 차오르면 한 발짝 떼는 일이 천근만근이라도 멈추지는 않기 위해서.


‘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그대들, 그대들은 덫에 걸리지도, 길들여지지도 말라. 그대들의 집은 닻이 아니라 돛대이게 하라'
- 예언자 , 칼릴 지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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