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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엄마다.

나는 괜찮아.



아침에 큰 아이가 부엌에 와서 의자에 앉았는데 우찌끈 쿵 하며 의자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 보니 아이가 일어나면서 “엄마 나는 괜찮아.” 한다. 싸서 비지떡인 듯한 의자는 바닥에 접힌 것처럼 붙어있었다. “안 놀랐어? 안 다쳤어?” 되물었더니 괜찮다고 한다. 소동이 지나가고 큰 아이는 자기 일을 하러 갔다. 마음 한편이 찡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에겐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우리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증거이다. 

 

큰 아이는 유치원을 한국에서 다닌 적이 있다. 아이가 집에 도착하고 선생님께 전화가 왔는데 오늘 유치원에서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아이가 서랍을 열다가 손잡이가 빠졌는데 그 서랍은 원래 낡아서 그런일이 자주 있으니 괜찮다고 달래주셨는데도 전혀 진정되지 않고 너무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아이가 많이 놀란 것 같으니 달래주시라고 부탁하셨다. 아이에게 물었더니 너무 무서웠다고 그 손잡이를 자기가 고장 낸 것에 대해 너무 겁이 났다고 했다. 여러 가지 정황을 물어보니 말 그대로 선생님은 아이를 달래셨지만 아이가 그 두려움에서 스스로 빠져나오기를 거부한 상황이었다. 

 

아이는 겁이 많다. 15살까지 크면서 일곱 대 정도 맞았다. 세 들어 사는 집 벽에 매직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세 대를 맞았고(미안하다ㅜㅜ), 나머지는 잘못했을 때 손바닥 한 대씩 맞았다. 한 대만 맞아도 아니 실은 맴매라는 말만 나와도 바로 진심으로 뉘우치고 잘못을 고백한다. 천성적으로 사부작거리고 활발한 에너자이저라서 일이 참 많았다.

 

식당에 가서는 이제 막 심어놓은 꽃들을 야무지게 뽑아서 꽃값을 물어줘야 했고, 언어 공부를 하러 다니던 남의 집 벽에 연필로(다행히) 그림을 그려서 지우개로 모두 지웠어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어려운 자리에서 하얀 카페트에 커피를 쏟아버려 다른 손님들의 눈총을 받으며 수건으로 한참을 닦아내야 했고,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는 티를 바닥에 쏟아 나는 정신없이 카페종업원에게 사과하고 친구는 우는 아이를 달랬다. 

 

애를 좀 잘 보지..그러게 말이다. 나도 참 그게 왜 그렇게 힘든 일이 었는지 모르겠다. 셋째를 키우니 딱 보면 애들이 뭘 만질지 알겠고. 조용한 아이에게는 꼭 가봐야 하며, 내가 누구랑 얘기하더라도 눈은 애한테 떼면 안 되고, 아무리 중요한 얘기 중에라도 “잠깐만”하고 아이를 보러 가봐야 한다는 것쯤이야 뭐가 대수인지. 그때는 이 쉬운 게 왜 그리 어렵고 나만 이런 것 같고 정말 눈 깜짝할 새 일어나는 이런 상황에 당황하고 숨고 싶고 미안하고 속상해서 아이에게 “괜찮아.”라는 그 말 한마디를 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아이가 상황보다 지나치게 자신을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걸 깨달은 어느 날에는 몸서리치며 울었다. 아이가 아픈게 내가 겁이 많고 실수가 많아서 아팠던 모든 순간들의 합보다 더 아팠다.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아이의 마음을 챙기지 못한 탓이었다. 어느 날은 마음먹어도 변하지 않는 내 모습에 더 이상 후회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일기도 썼다. 

 

그렇게 무거운 한 걸음. 앞으로 걸은 것 같은데 옆으로 휘청이다 뒤로 두발짝 물러서는 것 같은 도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어지지 않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이고 모여 가장 중요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는 15살이 되었고 나는 43이 되는 오늘까지 그 사이 두 아이를 더 낳고 키우면서 우리 둘 다 자라났다.

드디어 오늘 부서진 의자 때문에 혼날까 1도 걱정하지 않고 자기는 괜찮다는 말을 하고 가버리는 아이를 보며 마음이 흔들린다. 불안함과 두려움이 아닌 설레임에 흔들린다. 휘청거리다 뒷걸음치는 날이 있겠지만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면 되는 거다. 엄마가 그 길을 멈추지만 않으면 아이들은 어느새 바로 뒤에 따라와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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