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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가 흐르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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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원 짜리 선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미 잘 그려서도 아니었다. 그저 미술 시간에 스케치한 숙제로 A+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드디어 찾았나 싶었다.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상담을 하셨고 미술 시키려면 100만원도 넘게 든다는 말과 함께 나중에 커서 돈 벌어서 공부하라고 하셨다. 그 후 혼자서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여고생에게 스쳐지나간 얕은 바램이었을 것이다. 거절 당하는 순간. 그 이유가 돈이 되는 순간. 그림 그리는 일은 비싸고 나는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나이 마흔 셋에 코로나 시국에 '사이버 대학'에 편입했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자격증 하나를 더 따기 위해 듣고 싶지 않은 과목을 들어야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과를 둘러보게 되었..
이기적이다 중3때 주번을 같이 하던 친구 하나. 동그랗고 까만 뿔테에 귀여운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난 이기적이야" 자기 반성 보다는 약간 자랑섞인 말투에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나라면 감추고 감출 말을, 들으면 화를 낼 말을 자기에게 하다니 놀라웠다. 맛난 점심을 사주신다는 분이 계셔서 오랫만에 카페에 가 앉았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이 밖으로 나가며 우산을 펴는 모습이 통유리 넘어 보였다. 밖에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다행이다. 우리 도착하고 비와서." 일행 중 한 분이 멋쩍은 듯이 허허 웃으셨다. 그 웃음을 들은 내가 나에게 말했다. '너 참 이기적이구나. 지금 밖에 있는 사람은 비를 맞는데 너만 안 맞아서 다행이라구.' 순간의 이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이기적인 사람이다. 남..
초라함에 대하여 글 쓰기를 피해 그림으로 가보았다. 문예창작과 수업을 6개 신청했다가 4개를 빼고 그 자리를 그림 수업으로 채웠다. 여전히 어렵다. 뭐가? 나를 표현하는 것이. 글이 어렵고 그림이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내가 어렵다. 나를 쓰는 일이, 나를 그리는 일이 어렵다. 왜? 초라해서. 보잘것 없어서. 나를 쓰고 그리려 하면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막아선다. 머뭇거리고 주저하게 하다가 혼잣말을 한다. '지가 뭐라고..' 설거지통에 그릇과 빨래통에 빨래와 방바닥에 먼지가 사라지고 나서야 자격을 얻는다. 시간을 얻어 앉으면 내 앞에 초라함이 앉는다. 손 한번 휘저어서는 갈 생각이 없는 손님이다. 많이 떠나 보냈다고 생각했던 과거와 초라해질 미래까지 벌써 와서 현재 옆에 앉아 있다. 그래. 너를 써야 하는구나. 너를 이..
지나가버린 꿈 엄마에게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했었다. 그거 시키려면 100만원도 넘게 들거라는 동네 아주머니들의 말을 듣고 오신 엄마가 "너무 비싸서 안될거 같다. 나중에 니가 돈 벌어서 배워라" 고 미안해 하셨다. 매일 가던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미술학원이 있었는데 계단위를 몇 번 올려다 본게 다였다. 한번 올라가 물어볼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끝을 냈다. 그 당시 나의 여러 꿈들 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졌다. 마흔 다섯에 사이버 대학 마지막 학기를 공부하고 있다. 코스대로 끝낸다고 생각하니 기대가 되지 않았다. 다른 과의 수업을 다 돌아보고 설레는 과목만 듣기로 결정했다. 과제를 하다가 문득 그림이 나의 지나갔던 꿈이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 때와 지금을 계산해 보니 27년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이었을까. 문구점..
집구석. 아이들이 다시 온라인 수업을 하고 몸이 아프다 보니 집이 엉망진창이다. 그야말로 집구석이다. 한숨쉬듯이 “아. 이 집구석 좀 봐.” 했더니 옆에서 남편은 “왜? 뭐가?” 한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곳이 몸이 피곤하고 예민할 때 참을 수 없이 지저분해 보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는데 문득 사람은 자기가 규칙을 부여하고 그 규칙이 지켜지는 곳에 애정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애정을 느끼는 공간은 어디인가? 라는 생각으로 집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없다. 모든 것이 되는대로 놓여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당장 이 집을 떠나야 하면 무엇이 아쉬울까? 이 집 안에 물건들에는 아쉬움이 없다. 다만 이 집에서 바라보는 뒷집 아보카도 나무와 그 뒷편 산으로 지는 저녁 노을, 창문 밖 히말라야 풍경이 그리울 것..
우울할 때는 달다구리. 사흘동안 콧물이 나는 막내는 비가오고 날이 추워서 밖에 나가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창문 밖을 가리키며 나가자고 하는 아이에게 안된다는 말을 하는데 눈이 너무 슬프다. 우울해 하는 아이의 마음을 잠시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막대사탕 뿐이다. 위상을 높여두기 위해 평소에는 거의 주지 않는 막대사탕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잠시 기분이 좋아진 막내를 보며 달달함에 감사하다. 중간, 기말고사가 끝나면 돌아올 성적표로 우울해지는 나를 달래는 특별레시피가 있었다. 1000원이면 충분했던 간단 레시피인데 가나초콜릿을 중탕해서 녹인다음 소보로 빵위에 가득 발라 먹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돌아올 성적표에 대한 우울함이 조금은 날아가 좋아하던 드라마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우울함을 달래줄 자기만의 달다구리 레시피 하나 쯤은 가..
구정물도 햇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막내를 남편에게 맡기고 이 게임만 끝나면 같이 가자는 첫째를 뒤로 하고 둘째랑만 산책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저만치 앞서가는 아이의 등을 바라보는데 옆으로 흐르는 개울이 반짝인다. 그냥 흙탕물이 아니고 쓰레기를 품고 흐르는 악취도 더해진 구정물이 햇빛을 만나 반짝반짝 빛난다. 엄마한테 돌아온 둘째에게 "구정물도 반짝이네" 하니까 "햇빛때문이지" 하고 다시 앞서 간다. 그래.햇빛 때문이지.햇빛을 만나면 구정물도 반짝이지. 아니 어떤 물이든 호수이든 바다이든 유리컵에 담긴 물이든 햇빛을 만나면 반짝이지. 중요한 건 물이 아니라 햇빛이지. 구정물의 반짝임이 그 어떤 반짝임보다 아련히 들어온다.
기계가 무섭지 않다. 아빠 공장은 기계돌아가는 소리로 가득하다. 불러도 들리지 않기에 전화벨소리나 초인종 소리는 최대한 크게 설정되어 있다. 기계가까이 가지 말라며 어릴때부터 들은 사고 이야기를 빼더라도 공장에 들어갈때마다 귀는 놀란다. 얼마전의 나였다면 감당할 수 없었을 말을 들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잠을 잘 수 없고 위장병이 도질 그런 말이었다. 그러지 않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뭐지? 나 왜 괜찮은 거지? 일기를 적어두고 바라보았다. 말도 안되는 오해를 받았는데, 이제까지의 나를 부정당하는 것이었는데, 신뢰라는게 애초에 없었다는 거 밖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일인데도 괜찮다. 남편은 "그게 그 말이 아니잖아"한다. 말이 내 귀에 들리는 게 다가 아니라면서 그 말이 그 뜻이 아니란다. 저 말은 "말꼬리 잡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