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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가 흐르게 하며

종이장판 위의 집

이사를 자주 다녔었다. 검소해야만 했던 부모님은 이사할 집에 종이장판을 직접 붙이셨다. 그렇게 깔린 노란 종이장판은 네모반듯한 경계를 가지고 있었다. 엄마도 안계시고 남동생도 놀러나가 혼자인 집에서 나는 책을 꺼내든다. 해가 제일 잘드는 창문 가까운 종이장판 한 칸을 내 집으로 삼는다. 큰 방에 딸린 부엌 하나 집이어서인지 내가 어려서였는지 방은 넓었다. 그래도 그 한 칸만 이 내 집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작은 배개랑 책 몇권을 가져다 두고는 그 네모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기로 하고 웅크려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한 칸 안에서 삐져 나가지 않으려 긴장하며 책을 읽기 시작하다 조금 지나면 내 집은 두 칸이 되기도 했다. 어스름하게 저녁이 되어도 불을 켜지 않았다. 책이 나를 잡고 있기도 했지만 스위치를 켜려면 내 집이 아닌 네모칸을 밟아야 해서 그랬다.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오시면 남동생이 들어오면 종이장판 위에 내 집은사라졌다.




방안은 어스름하게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아직 텔레비전이 시작할 시간이 아니다. 장롱 옆에 서랍장이 있고 그 위에 이불이 있다. 작은 여자아이가 바닥에 웅크려 불도 켜지 않고 책을 읽고 있다. 아이가 놀라지 않게 나지막히 부른다. 아이가 고개를 돌리고 바라본다. “같이 나가자. 시장에 가서 떡볶이 사줄게.” 아이가 책을 덮고 따라나온다. 흥얼거리며 시장으로 걸어가는 아이에게 말한다. “우리 떡볶이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자! “ 아이가 손을 꼭 잡으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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