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내가 흐르게 하며

헌신


학교에서 예쁘다고 소문난 아이가 같은 교회를 다녔다. 학교에서는 나를 모른 척 하는 했고 나도 그렇게 했다. 교회에서는 집에도 왕래하는 사이였다.

예배가 마치면 항상 그 아이 데려다 주었다.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다. 항상 데려다 주었다. 얼핏 스치는 기억에 예쁜 아이들은 혼자 다니면 위험하다는 생각도 있었던 듯 하다. 그 아이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는 말도 못 걸 아이와 이야기하며 걷는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그 친구와 둘이 걷는 시간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배가 아파서 집으로 가고 싶었는데 그 말은 못하고 오늘은 나 먼저 집으로 간다고 했더니 친구가 안 된다고 자기를 데려다 주고 가라고 했다.

우리 집을 한참 지나 그 아이를 데려다 주고 오는 길에 울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친구라고 생각한 것은 나 뿐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우리 집을 지나쳐 그 아이를 데려다 주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화가 났다. 예쁘지 않은 나에게. 할 말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답답하고 볼 품 없는 나에게. 그 아이 앞에서 너무나 초라한 나에게 화가 났다.

커서도 내 곁에는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어느 날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가는데 중간에 전화를 받더니 약속이 생겼다며 너는 가라고 해서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무려 대학생때 말이다.

나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오리를 가자 하거든 십리를 가주고 겉옷을 달라는 이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라는 말씀 때문이었을까. 실제 그 말씀을 성경에서 처음 발견하고는 속상했던 마음에 위로를 받기도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를 미워하게 되는 어쩌지 못하는 찌질함에 '헌신'이라는 이름을 붙여 나를 다독였던 시간이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자발적 헌신'으로 나아가는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을테니.

이름을 붙였으니 나를 덜 미워할 수 있기를. 나의 찌질함에 대한 실랄한 비판도 조금 덜 하기를. 이렇게 내어 놓았으니 조금 덜 부끄럽기만을 바래본다.



'시내가 흐르게 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함이 되는 약함  (0) 2022.10.19
증거를 대고 싶다.  (0) 2022.09.30
부끄러운 엄마  (0) 2022.09.03
종이장판 위의 집  (0) 2022.08.29
억울함  (0) 2022.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