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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가 흐르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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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이슬 내 딸 케이디에게 책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 문장으로 끝냈다. '이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뿐이다. 그 메시지는 간단하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 책을 읽은 지는 삼 주가 넘었지만 이제야 쓸 수 있다. 울고 싶어 선택했다. 마음에 가득한 눈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고 싶었다. 폴의 고백은 진심이다. 그는 자기의 남은 숨결을 딸에게 바치며..
용기 " 음...너는 말이지...음...색깔이 없어...딱히 색깔이 없어.." 할 말을 찾지 못하며 중보할 시기이라 시도때도 없이 눈물을 터트리니 둘째가 "엄마 왜 울어?" 한다. "마음이 아파서.." "뭐 그렇게까지 마음이 아파?" 지금 나에게 '자기문제에 빠져 다른사람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는 이를 포함한 이들이 하는 말에 나자빠지게 되는 이유는 그런면이 내게 있기 때문이다. 하나밖에 잘 못한다. 특히 읽은 책에 빠져들거나 들은 이야기에 감정이 동하면 전체적인 시각이 사라지고 시야가 좁아지며 멍해진다. 대답도 잘 못하고 표정도 굳는다. 나자빠졌다. 꾸준히 날리는 잽으로 지금 나를 KO시켜 버리다니. '문제'란 자고로 '문제'라고 인식하는 사람의 '문제'라는 논리. 링위에 쓰러지니 그 목소리와 말투가 귀에 ..
긴 밤 지새우고. 아픈 아이를 사랑으로 키워내는 엄마가 있다. 친구들은 학교에 입학하지만 아이는 엄마를 엄마라고 부를 수 없다. 엄마는 아이에게 무엇을 바랄까. 나는 그 엄마를 만나 물어 본 적이 없다. 엄마이기에 엄마의 바람을 가늠해 본다. 오늘 하루를 잘 지내 주는 것. 숨을 계속 쉬어 주며 사랑을 받아 주는 것. 컨디션이 조금이라도 안 좋아 지는 날은 더 간절히 사랑할 것이다. 둘째가 백일 전에 39도가 넘은 고열로 일주일 입원을 했었다. 폐렴도 약간 있고 중이염도 약간 있지만 이 정도 열이 날 염증이 아니라며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커다란 침대에 헐렁한 환자복을 입고 누워 신음하는 작고 작은 아이를 보며 태어나서 아빠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가는 건 아니겠지.. 속을 다 태워버리려는 듯이 사랑은 불타올랐다. ..
간절히 비를 기다리며. 종일 책상에 앉아있었다. 시험기간이 다가와 밀린강의를 몰아서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는 막내 기저귀 갈아주고 밥 먹이고 화장실 갈 때 뿐이었다. 바깥공기가 좋지 않아 매일 하던 산책도 한동안 쉬고 있다. 왜 이런가 했더니 다른 지역에서 난 산불 때문이란다. 비가 오는 것 말고 방법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다. 다행히 짜증내지 않고 집에서 잘 놀아주는 막내에게 고맙다. 뉴스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다. 창문도 열고 싶지 않아 빨래도 안에다 널었는데 위에서 보면 저 정도인가보다. 하루 종일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떼지 않은 오늘같은 날은 글을 쓸 수 없다 생각했는데 일단 시작하니 또 적어지는 것이 신기하다. 원래 이 날씨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여기까지 쓰고 제목을 적었다. 몇년간을..
빨래를 개며 널 때는 축축하게 젖어있더니 어느새 바싹 말라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구나 하나씩 걷어내 바구니에 담아 가지고 서랍장 앞에 서서 개어 넣는데 니 생각이 나 너도 거기서 빨래를 개어야 하겠지 빨래를 걷으며 속울음을 삼키고 아이들 양말을 개며 몰래 눈물 훔치고 빨래를 개어 넣듯 슬픔을 개어 넣어야 하겠지 마르지 않은 마음을 젖은 채로 개어 넣어야 하겠지 우리 만나 실컷 울고 햇살아래 마음 말릴 날이 오기는 하겠지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선물로 받은 6주의 시간이 끝났다. 마음 밖으로 꺼내 본 적 없는 글을 쓰고 소리를 내어 읽었다. 더 이상의 자기소개나 개인정보는 필요치 않았다. 심지어 본명도. 우리는 불리고 싶은 이름을 정했고 모두들 그렇게 불러주었다. 처음 본 사람들과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마법이다. 우리는 나를 위한 글을 썼지만 남을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는 치유의 길, 온전함(Whole)을 향한 길에 함께 섰다. 우리는 중년의 여자로 기억을 더듬으며 고여있는 감정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고 몸과 함께 온전하신 하나님을 향해 걸어가는 동지들을 향해 깊은 연대를 느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 6주의 시간에 우리의 영성을 아름답게 지휘하신 우리의 나리님 사랑하는 언니에게 그리고 아픈 글을 써야 하는 순간..
막을 수 없다면. 지난 7일 히말라야 빙하가 인도 댐을 강타해 주민 150명이 실종되고 수천 명이 대피했다는 기사에서 '히말라야'라는 단어만 보고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연락이 왔었다. 댐은 어마어마한 물을 가두어 두기 때문에 한 번에 무너져 내리면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선물로 받은 6주간 '여자로 말하기 몸으로 글쓰기' 수업을 하며 감정에 대해 배웠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감정은 영혼으로 들어가는 문이다'라고 하셨단다. 우리는 계속해서 감정에 윤리성을 부여해 이분법적으로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나눈다고 하셨다. 그리고 억압된 감정이 때로는 꿈에서 물로 표현된다고 하셨다. 가끔 꿈에 나오는 거대한 수영장이 있다. 고래가 헤엄칠 만큼 큰 수영장이다. 회색빛이 천장까지 덮혀 있고 먹먹한 물 냄새와 물 ..
공부 안하는 모범생? 학교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 한 아이였다. 수업시간에는 잠 안자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수업을 듣지는 않았다.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가득했다. 주로 이런 생각들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뭘할까? 나중에 어디에 있게 될까? 늘 앞자리에 앉았는데 가사 시간에 공책에 그림을 그리다가 선생님께 들켰다. 선생님은 가사시간을 무시한다는 생각이 드셨던 것 같다. 정말 그건 아니었지만 내 행동을 달리 변호할 자격도 없는 순간이었다. 화가 많이 나 보이셨다. 한 동안 크고 예쁜 눈으로 아무 말씀 없이 나를 쳐다보셨다. 반항기 없는 내 모습에 스스로 마음을 추스리신 것 같았다. 선생님에게 가장 크게 혼난 기억으로 남아있다. 숙제 안해가서 종아리를 맞았던 수학시간보다도. 남편이 가수 누구 아냐고 묻는다. 팝송도 모르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