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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가 흐르게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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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기 전에_ 꿈 시험을 보러갔다. 대학 강의실 같은 곳인데 과목은 영어듣기 시험이다. 몇 문제는 노래를 듣고 맞추는 것이었다. 시험이 시작하는데 발 바닥에 떨어진 내 물건들이 많았다. 발로 대충 밀어서 의자 밑으로 안 보이게 밀어넣었다. 메모지가 있길래 여기에 메모를 하며 문제를 풀어도 되냐고 젊은 여성 감독관에게 물었다. 그러라며 허락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보고 있는데 먼저 나와 기분좋게 아름다운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전화가 왔다. 학교에 높은 관계자라 했다.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경계심이 들었다. 난 부정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고 학교에서 제공한 깨끗한 메모지를 감독관에게 먼저 보여주고 썼기 때문에 알리바이가 있다고 말했다. 나이가 지긋한 남성인 상대방은 나에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저 놀라워..
충분하다. 많이 먹어 속은 부대끼는데 만족스럽지 않은 그런 느낌으로 며칠을 보냈다. 그래서 더 먹으면 체하고 배 아프면서. 결국 최소한으로 밖에 먹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몸과 마음이 하나인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늘 한 발 늦는다. 뭐가 부족하지. 왜 이렇게 허하지. 채워지지가 않는 거지. 이 정도로는 너무 모자란다. 배가 고픈게 아니었다. 이번 달에 적게 들어왔다. 이미 들어간 것도 많고 또 더 들어가야 하는데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적었다. 서운했다. 그래서 당장 쓸 돈이 없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냥 확 넉넉히 채워지지 않은 가난의 느낌. 모자라는 마음. 부족한 듯한 상태. 남루하고 부끄러운 너무나 내 것이라 익숙한 감정들이라 그게 그냥 나였다. 이것도 보내기가 아까웠나. 버리기가 아깝고 쓰기가 아깝..
떠나고 싶다. 2018년 이 즈음이다. 비자로 큰 문제가 생겨 이 곳에서 떠나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새벽 창 밖을 바라보며 '과연 내가 이 풍경 바라보지 못하고 살 수 있을까?' 하며 무너져 내렸다. 모든 감정을 일단 멈춤으로 해 두고 해결을 위해 정신없이 이사를 하고 남편은 두 아들과 함께 모든 이삿짐을 날랐다. 나는 돌이 안된 막내를 돌보며 짐 정리를 해야했다. 다행히 문제는 해결 되었고 우리는 이 곳에 더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삶의 터전에서 뽑혀 나갈 뻔한 일을 겪고 나니 강제로 한국으로 나와야 했던 분들에 대한 나의 부족했던 공감이 심히 죄송스러웠다. 그 후로 5년. 시작은 그 때 부터였던 거 같다. 이 땅에서 뽑혀져 내팽겨질 것 같은 일을 겪은 후. 멈춰두고 가두고 방치해 버린 그 감정으로 인해 (그..
부활절 와플 부활의 아침에 같은 공간에서 예배하고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얼굴을 마주하였다는 사실이 와플로 증명된다. 처음가는 곳이어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어도 단 한 사람(같은 두 사람)이 있는 공간에서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맛보았다. 와플을 만나면 나는 부활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부활후에 삶은 빛과 그림자가 함께 할 수 있는 은혜를 맛보는 삶이다. 숨고 싶은 나. 후회하는 나. 움츠러드는 나. 걱정하는 나. 울고 싶은 나. 도망가는 나. 그런 나도 충분하고 완전하게 사랑받는 은혜. 약할 때 더욱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만나는 순간이다. 꼭 끌어안은 기억을 들고 돌아갈 준비를 한다. p.s. 녹차 아이스크림은 사진이 없지만 역시 부활을 기억하게 할 거예요. (한 몸의 다른 몸께 전해주세요 :)
드디어 만났다. 무슨 일을 하려해도 손에 잡히지 않는 몇 주를 보냈다. 글을 쓸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나의 불안와 그의 불안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깊이 숨겨져 있던 단추를 눌렀고 눌려진 상처는 숨기고 있던 지 몸집이 터져나올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이게 나오라는 건지 더 깊이 숨으라는 건지 하며 나만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는데 나는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아니 눈이 밖으로 향해 있었다. "지금 같지는 않겠지요." 현실감각이 뛰어난 말 이지.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 하니까. 그게 아니어도 모든 관계는 역동적이라 어제같은 오늘의 관계는 어쩌면 없는 거니까. 나는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그런 자신도 없이 나랑 관계를 시작한 것인가. 자신감. 결국 말 한마디에 무너질 알량한 그 자신감. 마주하지 못하게 한 것은 두려움이었..
선물 선물해야 할 분들을 위해 사 둔 선물 포장에 하루를 다 썼다. 선물을 사러 다니느라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다. 이번엔 남편 선물을 미리 사 두었다. 매년 우리가 반드시 챙겨야 할 선생님들을 위한 선물이 제일 먼저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해 본 적인 거의 없다. 다행히 올 해는 옷 한 벌씩 사 주었다. 남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은 결혼하고 처음인 거 같다. 다른이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해야 할 일을 제일 먼저 한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의무를 먼저 이행하는 삶을 사는 거 같다. 의무를 다하고 에너지가 소진되어 버리면 소중한 사람들을 챙기지 못한다. 오늘 더 속상한건 나와 나에게 속한 것들을 챙기지 못하는 나이다. 방바닥에 먼지가 굴러다녀도 내가 피곤하면 청소안하고 앉아있는 거 말고. 잠시라..
모양. 능력 겸손에 대한 글을 읽으며 나 아닌 그를 떠올렸다. 그에게 마지막 퍼즐이 겸손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지나가려 했는데 모양과 능력에 대한 말씀이 떠올랐다.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부인한다...곰곰히 생각해보니 모양은 없으나 능력을 부인하지 않는 사람인 것을 의심할 수 없어졌다. 그는 모양을 추구하지 않는다. 모양을 놓지 못하는 것은 대개의 경우 나이다. 대부분의 모양을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다 가지고 있는 게 나이다. 그는 거슬린다. 모양을 갖추려 하지 않아서이다. 갖추려 하는데 되지 않는 거라기 보다 왜 그런 모양을 가져야 하는지 되묻는 편이다. 모양을 따르지 않으려 하는 그를 교만하다고 보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가끔 그의 자찬에 화들짝 하는 부분은 그게 사실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말..
악함이 되는 약함 ‘무시’에 약한 나를 발견하고 무시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는 가운데 당한 ‘무시’가 나를 깊이 찔렀다. 아프니 화가 나고 분노가 일었다. 글과 기도를 동원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화를 쏟아냈다. 설거지를 하며 산책을 할 때도 청소를 하면서도 분노를 쏟아냈다.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나를 압도했고 계속 밀고 들어왔다. 이틀 쯤 열심히 쏟아내고 나니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기도는 이렇게 했다. “이제 제 마음에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을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는 그냥 있었다. 문득 ‘무시’ 에 대해 알고 싶어져 너튜브에서 무시를 검색했다. 한 영상을 보았다. 알게 되었다. 무시를 당해 고통스럽게 보낸 며칠동안 이번에 나는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걸. 전혀 나를 공격하지 않았다. 나를 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