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려 깊은 수다

(18)
기꺼이 십 리를 동행하기 #1 햇빛이 쨍쨍한 더운 여름날 친구랑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같이 가고 있었다. 우리 집 앞을 지나가면서도 그 친구의 집까지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2 친구랑 같은 역에 내려서 친구가 집으로 가고 나서 마을버스를 타고 집에 온다. #3 "같이 가자." 는 말에 따라가 다른 일을 하는 친구옆에서 3시간을 보내고 집에 온다. #4 "우리 집에 가자~" 는 말에 따라가다가 중간에 전화받고 "나 약속 생겼어. " 라는 말에 집으로 돌아온다. 나를 돌아보는 중에 생각난 몇 가지 사건들을 아들과 나누었더니 "엄마 완전 호구였네"한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마5:41)' 5학년 때(#1) 교회끝나고 학교에서는 나를 모르는 척하는 친구를 집까지 데려다 주..
정말이야!!! "나도 그런 얘기 들어본 거 같은데. 그래도 너가 한 번 찾아봐. 그래야 확실하지" 때로는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어도 누군가 두 번 이상 "정말이야?" 하고 묻는 다면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진다. 그 물음이 의심이 아니라 놀람이거나 기쁨이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저런 말을 남겨줘야 마음이 편해진다. 간혹 어떤 정보를 주고 나서 그게 정말 그랬는지 찾아보고 틀렸으면 다시 알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저 위에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엄마가 나에게 한 말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하더라며 신나게 얘기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저 말이 기억에 남아 글을 쓰게 되는 이유를 적어보자면, 깜짝 놀랐다. 나는 말투도 엄마랑 닮았구나. 그럼 그것이 나인가? 엄마의 영향인가? 아빠와 엄마 이제는 남편까지 그 모두와 함께..
충분히 '그 역시 삶의 비극성에 대한 감각으로 뜨인 눈이다. 고통과 비극은 인간 실존의 기본 설정- 그 극한은 죽음이다-이고, 사람과 사람을 이어 주는 끈은 고통이다. 'p233 삶의 비극성에 눈이 뜨인 그 날.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학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고 수업이 끝난 아이들을 학원에 태워다 주려 엄마들이 타고 온 차들이 서 있는 길은 신차 전시장을 방불케 했다. 그 사이를 지나 버스 정류장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아파트 상가를 지나야 했는데 바로 그 앞에 한 할머니가 앉아계셨다. 도라지며 직접뜯은 듯한 산나물들을 담은 비닐봉지 네 다섯개를 앞에 두고 몸을 살짝 돌려 앉아계셨다. 동네 시장에서는 늘 뵙던 할머니들인데 그곳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삶은 고구마 두 개를 싼 비닐봉지를 손에 쥐고 몸을 ..
나는 느린 아이다. 엄마 친구분들이 모이면 엄마에게 자주 하시던 말이있다. " 아휴..그 집 딸은 왜 그렇게 느려. 내가 저번에 전화하는데 여보세요 끝나기 기다리다 숨 넘어가는 줄 알았네.." 아버지 돌 굴러가유의 동네가 아빠의 고향이다. 태어나지도 않았고 일년에 몇 번 밖에 가지도 않던 아버지 고향의 영향을 그렇게 받고 있나보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나는 느려진다. 몸은 움직이고 있더라도 머리는 생각을 하더라도 마음은 느려진다. 모든 상황이 지나가고도 쉬이 떠나보내지 못하고 곱씹고 또 생각한다. 어제는 병원에 가기도 쉽지 않은 지방에 계신 선생님 부부께서 코로나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회복중이시라고 자세한 소식을 직접 전해 들었지만 놀람에 마음이 느려져 버렸다. 무어라 대답을 했어야하는 카톡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행복하니? 대학 졸업 후 월 60을 받으며 학원강사를 했었다. 내가 어릴 때 다니던 학원 자리에 있던 보습학원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학교끝나고 오기 전 까지는 사무실을 같이 쓰는 원장님 남편 일을 도왔다. 원장님은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출근하는 학원이고 아이들은 오고 싶은 시간에 와서 가고 싶을 때 집에 갔다. 문제집 푸는 걸 도와주는 정도였다. 집에서 걸어서 3분거리여서, 일하는 직원이 나 뿐이라서, 월급이 적은 만큼 원하는 게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 곳을 선택했다. 집 밖에 나가지도 못했던 때보다는 많이 좋아져서 내린 결정이었다. 엄마는 내가 첫 월급을 받자마자 은행에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딱 반 매월 30만원 짜리 적금을 들게 하셨다. 그 돈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치과치료도 하게 ..
엄마를 찾아. 자다 깼다. 엄마를 부르며 울다가 부엌으로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안다는 듯이 계속 걸어갔다. 빨간 불로 바뀐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섰다.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 자동차들은 불을 켜고 달리고 있다. 자동차들이 빗속을 달리는 것 같이 보이는 건 내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아주머니가 말을 건다. "얘야. 너 혼자. 어디 가니?" "엄마 찾으러요." "엄마가 어디 갔는데?" "몰라요" "어머. 너 길을 잃어버렸구나. 경찰서에 데려다줘야겠네. 근데. 아줌마가 지금 교회 가서 예배드려야 하는 시간이라. 너 아줌마 따라 교회 가자. 그리고 내가 경찰서에 데려다줄게." "네" 엄마를 찾아가던 내게 말을 건 모르는 아주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다. 아주머니가 예배를 드리는 동안 처음에는 그 옆에 앉아 ..
어땠을까. 피아노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느라 평소 다니지 않던 길로 들어섰는지 모르겠다. 짓궂은 남자아이들이 서 있다는 걸 가까이 가서야 알아차렸고 움츠러드는 나를 알아보았는지 한 아이가 뒤로 다가와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오던 다른 남자아이도 한 번 더 머리를 잡아당기고 도망쳤다. 덩달아 남자아이들을 따라 뛰기 시작했지만 그 아이들을 쫓아간 게 아니라 집으로 뛰어갔다.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서자마자 가슴이 뛰었다.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따라온 아이는 없는 것 같았다. 엄마에게 있었던 일을 말하며 울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못했지만 우리 집을 따라온 아이들이 있을 거고 내가 집 밖에 나가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또 괴롭힐 것이다. 무서웠다. 눈물을 멈추지 않..
덧니. 사이버대학에서 한국어학과 과정 공부를 하고 있다. 모든 수업이 온라인이지만 유일하게 오프라인으로만 가능한 실습과목이 있었는데 코로나로 온라인 실습의 길이 열렸다. 코로나로 얻은 혜택 중 하나이다. 줌으로 30분 정도 교수님 앞에서 시연해야 하는 수업을 준비하며 혼자서 하루 종일 연습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처럼 학생들에게 발음도 보여주어야 하기에 최대한 카메라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해야 하는 수업이었다. 하루 종일 연습하며 가장 힘들었던 일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웃을 때 마다 발음을 크게 할 때 마다 보이는 덧니가 그렇게 보기 싫다. 얼마전 글쓰기 모임에서 나는 내 코가 싫다고 썼다. 덧니도 그만큼이나 싫다. 중학교 때 친구들이 하나 둘 교정을 시작하는 걸 보며 엄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