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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냥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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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일기. 아이들을 위해 써둔 일기장이 있다. 내 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일기이다. 아이들 대신 내가 써둔 일기장. 어렸을 때 일이 궁금해 지는 건 아이를 낳고 나서인 것 같다. 어릴 때 잠 안 자던 둘째를 보며 뒤집지 않고 잘 기어다니지 않던 셋째를 보며 누굴 닮았나. 내가 그랬나. 이런 것들은 애를 낳고 나서야 궁금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 나이가 되어 엄마에게 물어보면 잘 기억하지 못하신다. 그리고 만약. 아이들이 물어보고 싶을 때 내가 없다면 영원한 비밀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만이 아닌 건 택이 아빠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응답하라 1988에서 택이가 큰 대회에서 우승하며 택이 아빠가 인터뷰를 하게 되는데 기자가 태몽이며 태어난 시를 물어본다. 아무대답도 못하는 아빠는 엄마가 없는 아..
나는 그냥 엄마다. 미운 세 살, 거친 말이 들어가는 일곱 살, 그리고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 때 한 번 씩 겪는 고비들인데 실은 나는 유행처럼 하는 말들은 믿지도 않고 잘 쓰지도 않는 편이다. 그런데 살아오고 보니 그 단어들은 지혜가 주는 경고 같은 것이다. 세 살, 일곱 살이 그리고 사춘기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수식어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만큼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있어서 변화를 요구당하는 것이 부모 입장에서 힘들고 어렵다는 말일 것이다. 갓난아이는 자기의 생명을 부모에게 맡긴다. 처음에는 내가 이 생명을 맡아야 한다는 사실에 두려움도 느끼지만 어느 순간 익숙해지면 그 생명에 대한 모든 결정이 내 것인 양 느껴진다. 내가 옷을 입히고 내가 먹이고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게 당연해질 때쯤 아이는 이제는 자기도 이 결정들..
불안 일기 노트북을 손에 들고 문을 열었는데 셋째가 갑자기 뛰어나가다 넘어져 얼굴을 바닥에 부딪쳐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잠시 후에는 유모차에 타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모차가 뒤집어지며 아이를 덮쳤다. 소스라쳐 일어났더니 꿈이다. 외출의 자유가 자유인지 알 지 못했을 지난달에 막내만 데리고 외출할 일이 있었다. 내가 잡은 약속이었고 의미가 충분한 모임이었다. 그런데도 전날 밤 나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수영장에서 일렁이던 물이 갑자기 살아나서 내 옆에 서있던 막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 바로 알아챘다. 아이와 단 둘이 하는 외출이 불안했던 것이다. 아무 일 없는 날에도 불안하고 외출할 일이 있는 날은 더 불안하다. 불안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 다칠까, 넘어질까, 혹시라도 어떻게 될까 봐 애지중지 하는 마음은 어느 ..
나는 괜찮아. 아침에 큰 아이가 부엌에 와서 의자에 앉았는데 우찌끈 쿵 하며 의자와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라 보니 아이가 일어나면서 “엄마 나는 괜찮아.” 한다. 싸서 비지떡인 듯한 의자는 바닥에 접힌 것처럼 붙어있었다. “안 놀랐어? 안 다쳤어?” 되물었더니 괜찮다고 한다. 소동이 지나가고 큰 아이는 자기 일을 하러 갔다. 마음 한편이 찡했다. 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나에겐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고, 우리 관계가 많이 회복되었다는 증거이다. 큰 아이는 유치원을 한국에서 다닌 적이 있다. 아이가 집에 도착하고 선생님께 전화가 왔는데 오늘 유치원에서 많이 울었다는 것이다. 이유인즉, 아이가 서랍을 열다가 손잡이가 빠졌는데 그 서랍은 원래 낡아서 그런일이 자주 있으니 괜찮다고 달래주셨는데도 전혀 진정되지 ..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 아무도 묻지 않을 때 나는 안다. 누군가가 물어와 설명을 하려고 하면 모른다' - 아우구스티누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고 이 글을 인용하는 거면 참 좋겠는데 여의치 않아 그냥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 가져왔다. '시간'에 대해 정의하는 고충을 표현했다 한다. 어찌나 맞는 말인지. 나는 어느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글을 쓰려니 모르겠다. 어디서 조금 막힌다 정도가 아니라 그냥 아예 모르겠다. 봉쇄 19일째 아이들에게 어느정도 자유롭게 노트북사용을 허락해주었다. 방학이라 기대도 있었을텐데 하루 종일 집에만 있어야 하는 아이들이 너무 지루할 것 같아서다. 그런데 큰 아이는 게임을 하다가 뭐가 잘 안 된다고 한숨을 쉬며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며칠 전 부터 이어진 짜증에 물었다. 게임을 재밌으려..
슬픈 사랑은 여기까지. 마흔에 낳은 셋째딸은 사랑, 그 자체이다. 볼을 부비면 나는 침냄새는 세상 그 어떤 향수보다 향기롭고, 깔깔대는 웃음소리는 세상 모든 행복을 내게로 가져다준다. 끌어안고 콧등을 서로 비비며 웃으면 나는 벅차오른다. 그 행복한 순간에 나는 눈물이 툭 떨어질것 같은 슬픔에 당황한다. 정말 울기도 했었다. 몇번 그런 감정에 놀라 생각해보았다. 왜 슬픈 것인가. 큰 아이는 11년 작은 아이는 7년 더 일찍 내게 왔다. 우리가 함께 할 시간은 그 보다 짧다.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시간이 짧다는 것 때문이었다. 세상의 무서운 기사들을 접할 때. 여전히 여성들에겐 공평지 않은 사회를 만날때. 희생을 당연히 요구받는 여성들의 외침을 들을 때. 나는 너무 두렵고 너무 미안하다. 엄마로써. 여자로써. 아직 말을 하지 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