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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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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오늘. 인도 일일 확진자가 35만명을 넘어서니 여기도 덩달아 하루에 4천명을 넘어가고 있다. 경계선도 제대로 없이 국경을 맞닿고 있는 인도상황에 같이 흔들리고 있다. 학교들은 이미 온라인수업에 들어갔고 오늘 락다운이 시작되었다. 몇주 전 부터 락다운 소문이 돌고 사재기하는 사람들이 보이더니 소문이 아니었다. 백신에 대한 뉴스들이 나오고 확진자도 감소하여 지나가고 있구나 했는데 전보다 심각하게 다시 시작이다. 생존에서 생활로 건너오며 한시름 놓았던 마음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다. 아침 저녁으로 생필품 가게는 열도록 허락되어 필요한 것들은 다 구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도에서 공급하지 않으면 식량도 약도 가스도 석유도 구할 수 없기에 인도의 상황이 악화되지 않기를 바란다. 2명의 확진자로 시작했던 락다운의 경험으로 ..
셀로띠 크리스마스겸 새해 선물로 셀로띠를 선물받았다. 일람이 고향인 V선생님의 특제선물인 일람티와 동네에서 재배해 가족들이 먹는 강황가루. 우리로 말하자면 가족만 나눠먹는 고춧가루 같은 것이다. 고향에 다녀오실 때마다 잊지 않고 우리 몫을 꼭 챙겨주신다. 올 해는 큰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꼬박 하루길을 버스로 다녀온 선생님의 선물이다. 셀로띠는 무슨 맛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찹쌀 튀김 비슷한데 전혀 쫀득이지 않는 맛 정도라면 어떨까 싶다. 셀로띠는 한국에 전 비슷한 명절음식이다. 한국 시장에도 전을 파는 가게들이 많듯이 여기도 길거리에서 파는 집들이 종종있다. 나도 좋아해서 가끔 사먹는다. 한 2개 먹으면 배가 부르다. 저 사진을 찍기 전에 이미 큰 애가 두개 막내가 한개를 가져갔다. 셀로띠를 하려면 엄청 큰 ..
소로우가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이 집을 갖기 전에 소유해본 유일한 집은 보트를 제외하면, 이따금 여름에 여행 할 때 사용하던 텐트 하나뿐이었다. 이 텐트는 돌돌 말려 지금은 다락에 처박혀 있다... 그처럼 가벼운 겉 옷만을 걸친 이 집의 뼈대는 내 주위에 형성된 하나의 결정체 같은 것이었고 집을 지은 사람인 나에게 반응을 했다...나는 구태여 바람을 쐬기 위해 밖에 나갈 필요가 없었다. 집 안의 공기가 조금도 그 신선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 안에 있었다기보다는 차라리 문 뒤에 앉아있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인데, 그것은 비가 몹시 오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 월든, 헨리 데이빗 소로우 브런치에서 구독하는 몬스테라님이 추천하셨던 책이라 읽기 시작했지만 아직 중간도 읽지 못해 전체적인 내용에 대해 말 할 단계는 아니다...
안 좋은게 좋아진 순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내 눈 앞에 자리 잡은 안경은 신체의 일부가 되어서 그 자리에 잘 있어줄때는 불편함이 없지만 벗어둔 안경이 보이지 않을 때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는 누군가를 불러야 할 정도로.. 그런데 정말 30여년 만에 처음으로 눈이 나쁜것이 이렇게 좋은 일이었나 싶은 순간을 맞았다. 때마다 다가오는 날들을 기념하는 일과 거리가 먼 나이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올때마다 트리를 만들자는 큰 아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몇 해 전 장만한 트리는 벌써 다리가 다 부러졌다. 그리고 자기 의지가 더욱 강해진 막둥이의 손에서 최대한 멀리 설치해야 하는 이유가 더해져 트리는 공중으로 들려졌다. 동네 전파사에서 사온 전구까지 둘러서.. 세수하고 안경을 벗은 채로 나와 우연히 마주하게 된 불..
산책 20.12.1 잠자리에는 텐트를 쳤고 방안에서는 패딩을 입어야 하는 영락없는 겨울이지만 햇빛이 비추는 곳만은 봄이 부럽지 않은 따스한 이 길. 신난 막내를 따라 가다보면 동네구경, 사람구경, 너무나 익숙하지만 내 것은 아닌 풍경들. 그래서 인지 매일 보면서도 매일 사진이 찍고 싶어진다.
집 9th. 지금 사는 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전에 살던 집이다. 지금도 이 집 앞을 지나 산책을 간다. 기분이 이상하다. 집안의 모든 구조를 알고 있고 곳곳에 우리 가정의 소중한 추억이 깃들어 있는 집인데 굳게 닫힌 대문 안으로 한 발 짝도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는 안된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설렘이 아쉬움보다 늘 컸었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지날 때마다 그 집에서 있었던 우리의 추억들이 나를 잡아끈다. 그중에 나를 가장 잡아끄는 추억은 가족들이 모여 막내의 돌잔치를 하고 사진을 찍었던 순간이다. 내가 만들어준 개량한복을 입고 돌사진을 찍은 지금보다 작은 막내가 거기에서 아장아장 걸을 것만 같다. 또 이사를 한 이유, 그전에 집에서 이사를 한 이유 포함해 최근 세 번의 이사는 모두 비자 때문이다. 15..
집 7th. 쉼도 삶의 부분임을 인정한 시간. 깊은 잠을 샘내듯 가끔 흔들어 주는 여진은 애교로 느껴질 정도로 일상이 돌아왔고 무너져 내린 담장들과 금이 간 건물들만이 지진이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다시 이사가 찾아왔다. 지진이 조금 잠잠해지자마자 매번 은행에서 오는 거다 친구가 구경 오는 거다 라며 낯선 사람들을 데려와 집을 보게 하던 주인 할아버지 부부가 큰 지진을 겪고 심신이 미약해지신 이유로 집을 팔고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주하시기로 드디어 결정하셨기 때문이다. 많은 집들이 지진에 의해 금이 가거나 파손이 되어 수리가 필요했고 또 아파트나 시내에 살던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사를 원했기 때문에 집을 구하는 일이 어려웠다. 애써 구한 집에 계약을 하겠다고 전하면 가격을 다시..
집 6th. 땅이 움직인다. 찬양이 끝나고 대표기도가 시작되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바닥이 파도처럼 내려갔다 올라온다. 그 위에 얹어져 있던 내 몸은 힘없이 파도타기를 한다. 눈은 떴어도 몸을 세울 수가 없다. 땅은 계속 파도를 타고 겨우 벽을 짚고 일어나 밖으로 나왔는데 코끼리 코를 20번쯤 한 후와 같다. 번뜩 애들이 떠올라 미친듯이 이름을 부르며 주일학교예배를 드리던 2층으로 뛰어 올라갔는데 아무도 없다. 다행히 애들은 이미 밖에 피해있었다. 휘청거리며 내려와 신발을 찾아 신었다. 그리고 몇군데 무너진 곳을 바라보며 다들 넓은 마당에 모여 앉아 예배를 마저 드렸다. 다시한번 땅이 파도를 일으키며 교회 창문들이 떨리고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와 더불어 바람이 불며 어두워 지던 하늘이 몸을 흔들어 댔다. 집에 돌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