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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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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5th. 가난보단 옹졸함이 부끄럽다. 이 집에 살면서 그런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남편에게 이번 달 생활비를 달라 했더니 300루피 (약 3000원)를 주면서 잘 쓰라고 해서 속상했다는 그런 이야기였다. 분명 남편은 기억도 하지 못할 장난을 나 혼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무슨 낭비라도 할까 봐 생활비를 안 준다는 둥 혼자 서운해한 흔적들이 우습다. 당연히 그때는 지금처럼 웃을 수 없던 이유가 있었지만. 애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하면 대신 과일을 먹여야지. 라고 생각했다. 과자도 사고 과일도 살 순 없으니까. 그날도 유치원에서 애들을 데리고 집에 가는 길에 애들이 과자를 사달라고 했다. 그때 애들이 좋아하던 봉지과자가 한 개에 40루피였으니 두 개 하면 80루피다. 그 돈이면 더 보태서 사과 1kg를 살 수 있으..
집. 4th. 이 집에서 나는 아주 힘들었다.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일단은 이 집에서 내가 겪은 일들 중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 하나만 적기로 한다. 둘째가 될 뻔했던 아기를 잃었다. 남들이 쉽게 말하는 유산. 정말 어이없이 그냥 '유산'이라고 한다. 많은 엄마들이 경험한 일이라 그래서 그런건가. 어느 날 갑자기 둘째를 낳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 마음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살면서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이 있는데 그 때였다. 본능인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선명한 두 줄로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너무 기뻤는데 다음날 부터 갈색혈이 보이기 시작했다. 많이 불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곤 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기에 안심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더니 며칠이 지나도 멈추지를 않..
집. 3rd. 이 집을 구하게 된 건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집을 구한다는 걸 아는 언니가 브로커(알음알음 번호를 구해야 하는 부동산 중개인)도 소개해주시고 집도 같이 보러 다녀주셨다.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날 집을 보러 브로커를 따라갔는데 도착한 집이 바로 그 집이었다. 아이를 안고 업고 재우며 창문으로 보던 회색 집. 우리 집에서 매일 보던 그 집이었다. 친근함 때문이었을까. 아주 큰 세퍼트와 더 무섭게 짖어대는 제페니즈 스피츠가 있었는데도 그 집으로 결정했다. 지은지가 2년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외국인에게 집을 주려고 비워놓은 1층이었는데 이게 함정이었다. 아끼는 집에 예민하신 주인 아주머니는 주로 마당 텃밭에서 시간을 보내셨는데 커튼이 열려있을 때 보셨는지 집 안에 신발장을 놓는 일에도 잔소리를..
집. 2nd. 글을 쓰니 좀 가벼워진다. 기억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 많이 무거웠던 것이다. 두 번째 집은 벽이 하얀 집이었다. 여기는 집 안팎을 페인트로 칠하기 때문에 색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큰 애는 여기서 낳았다. 아이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네팔리라고 놀린다고 한다. 네팔아이들이 한국애를 네팔아이라고 놀린다는거다. 겁 많고 소심한 내가 여기서 출산을 하다니. 그건 정말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는 고통은 내가 오롯이 겪어내야 하는 것이니 한국이건 어디건 그 고통의 크기는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다. 주변에 여기서 아이를 낳고 한국에서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여기서 출산하신 분이 계시다. 대단하신 분이다. 출산의 고통을 의술..
집. 1st. 2005년 이곳에 오고부터 열 번의 이사를 했다. 저마다에 깃든 추억을 기억이 선명할 때 남겨보고자 한다. 그 발자취가 또한 나의 역사이니. 더불어 기억의 무게도 덜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집. 처음에 와서는 선임 선생님의 집에 묵게 되어있었다. 학교 근처에 있던 집인데 학교보다 오 분쯤 더 아래로 내려갔어야 하는 집이었다. 핑크와 파랑의 강렬한 대비가 기억에 남는 집이었다. 비어있던 집에 들어갔고 본인 침대만 빼고 모든 것을 사용해도 된다고 하셔서 일단 침대만 주문했다. 수공으로 직접 만드는 더블 침대 가격이 2만 9천 원이었다. 집주인이 유명한 이불집 사장이었는데 부인과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고, 우리 집은 3층이었다. 방 1개 거실 1개 부엌 1개. 그중에 방 한 개에 선임 선생님의 침대와 옷장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