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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나

집. 2nd.



글을 쓰니 좀 가벼워진다. 
기억이란 이름으로 내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것들이 많이 무거웠던 것이다. 


두 번째 집은 벽이 하얀 집이었다. 여기는 집 안팎을 페인트로 칠하기 때문에 색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큰 애는 여기서 낳았다. 아이는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네팔리라고 놀린다고 한다. 네팔아이들이 한국애를 네팔아이라고 놀린다는거다.


겁 많고 소심한 내가 여기서 출산을 하다니. 
그건 정말 처음이라 아무것도 몰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이를 낳는 고통은 내가 오롯이 겪어내야 하는 것이니 한국이건 어디건 그 고통의 크기는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잘못된 생각이었다. 주변에 여기서 아이를 낳고 한국에서 아이를 낳은 후에 다시 여기서 출산하신 분이 계시다. 대단하신 분이다. 


출산의 고통을 의술이 도울 수 없다는 그런 무식한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하게 되었던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여하튼 병원 복도에서 촉진제를 맞으며 진통을 했다. 복도는 좋은 자리였다. 아주 큰 병실 안에는 30개쯤의 침대가 있고 가운데 화장실이 있었는데 진통하는 여자들의 신음과 울음과 땀과 화장실 냄새가 섞인 그곳보다 창문이 열려있고 딱 세 대의 간이침대만이 놓여있는 복도가 제일 좋은 자리였다. 여기까지만 쓰겠다.*


3.8kg로 태어난 건강한 아들을 데리고 집에 왔다. 탯줄도 떨어지지 않은 갓난 아이를 씻기고 먹이고 하는 일이 남편과 나에게 맡겨졌다. 아이가 잘 때면 나의 육아의 8할을 감당한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읽고 읽고 거의 외울 때까지 읽었다. 병원시설이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더 열악했던 그때 네팔에서 아이를 키우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책에 나오는 표본을 보여주듯이 아이는 자랐다. 모유를 먹고 나면 4시간씩 푹 자고 밤에는 통잠을 자며 새벽 5시나 되어야 깨었다. 목을 가눈다고 하는 날이 되자 목을 들고 뒤집는 다고 하는 개월 수에 딱 뒤집고 이도 책에 나오는 대로 났다. 감사할 뿐이다. 


그 집에서 아이를 키우는 중에 갑자기 단수문제가 생겼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6시까지는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 외의 시간에도 물은 언제든 나오지 않을 수 있었다. 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큰 통에 물을 받아두고 썼다. 어느 날엔 밤에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물통에 빠진 작은 생쥐로 인해 아까운 물을 버려야 했다. 


그즈음에 남편이 한국에 있던 동생에게 여기로 오라고 제안했다.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와서 같이 지내보자는 것이었다. 그 대화는 인생의 획을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얻은 유익은 말로 할 수 없이 풍성하다. 새 식구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이사를 결정했다.

 

*여기까지만 쓰려했던 이유는 출산의 고통에 대해 늘어놓으면 끝이 없을 거 같아서 였는데 그러다 보니 너무 많은 이야기를 건너띄었다.

7시간 넘는 진통의 시간동안 내 손을 잡고 "20분만 있음 나올 거 같아.."를 몇번을 외쳤던 언니가 없었다면. 내 눈이 뒤집어 지는 걸 보며 수술을 해야하나 망설여졌다고 나중에 얘기하셨지만 언니가 준 확신으로 나는 자연분만을 할 수 있었다.


내 동생이 왔었다. A&P목장을 통해 전해받았던 신생아를 돌보는데 꼭 필요한 사랑의 선물들, 편지들이 외로운 육아가운데 얼마나 힘이 났는지 모른다. 친구들이 보내준 책이며 이유식기들도 모두 하나같이 소중했다.

 

미역국을 끓여주시고 반찬을 해 다 주시고 기저귀도 사오셨던 많은 분들 덕분에 기운을 차렸다.

 

기억은 완전하지도 영원하지도 않다는 걸 적으면서 깨닫는다. 더 흐려지기 전에 적는 일을 시작한 건 너무 다행이다. 혼자였다. 는 말은 쉬이 할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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