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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나

집. 1st.



2005년 이곳에 오고부터 열 번의 이사를 했다. 저마다에 깃든 추억을 기억이 선명할 때 남겨보고자 한다. 그 발자취가 또한 나의 역사이니.
더불어 기억의 무게도 덜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집. 처음에 와서는 선임 선생님의 집에 묵게 되어있었다. 학교 근처에 있던 집인데 학교보다 오 분쯤 더 아래로 내려갔어야 하는 집이었다. 핑크와 파랑의 강렬한 대비가 기억에 남는 집이었다. 비어있던 집에 들어갔고 본인 침대만 빼고 모든 것을 사용해도 된다고 하셔서 일단 침대만 주문했다. 수공으로 직접 만드는 더블 침대 가격이 2만 9천 원이었다.


집주인이 유명한 이불집 사장이었는데 부인과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고, 우리 집은 3층이었다. 방 1개 거실 1개 부엌 1개.
그중에 방 한 개에 선임 선생님의 침대와 옷장이 있었으므로 거실이 우리 방이 되었다. 거실에는 큰 책상이 하나 있었고, 아주 크고 무거운 책장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대나무 의자 두 개. 이렇게 적으니 그 집 거실에 있는 듯하다.


저녁 먹고 둘이서 집 근처 논밭으로 산책을 다녔었는데 이제는 집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쌀 사러 계란 사러 현지어 몇 마디를 외워 다녔던 젊은 외국인 부부를 향한 시선에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정치적으로 복잡한 시기였던는데 어느 날 밤에는 갑자기 주인아주머니가 뛰어 올라와 불끄고 커튼을 닫으라 하시길래 놀라 불을 끄고 있으니 멀리서부터 냄비 같은 것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던 한 무리가 집 앞으로 지나갔다. 시위대인데 불을 켜고 있는 집에는 돌을 던진다고 했다는 것이다. 소리가 멀어져도 커튼 한번 들춰보지 못하고 숨 죽이고 있던 그런 초년생 시절도 있었다.


놀랍고 새로운 하루하루를 맞이하던 중 선임 선생님의 부고를 접했다. 위암으로 투병 중이셨으나 두 달 후에 오신다는 이메일을 받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남편은 그대로 책상에 앉아 아침이 될 때까지 메시지를 준비했다. 설립자의 갑작스러운 부재로 인해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할 선생님들에게 위로와 안정을 주어야 하는 그에게 그날 밤은 짧고도 어두웠다.


아침이 되어 부고의 메시지를 들고 학교를 다녀온 남편은 놀라운 말을 했다. 부고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슬픔의 깊이로 인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식적인 확인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뒤로 두고 본부에 연락해 홈페이지에 영어로 확인이 가능한 정보를 게시해달라는 부탁을 드렸고, 그렇게 사실 관계를 확인시켜 줄 수 있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깨닫게 되었다. 부고를 믿지 않는 게 아니라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이었다. 선임 선생님이 안 계신 사이 우리가 왔고 3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니 모두가 불안했던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7시 교감 선생님이 부인과 함께 와서 문을 두드렸다. 얼떨결에 들어와 같이 앉았고 여러 가지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를 전하셨다. ‘우리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우리는 너의 편이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에게 알려달라’ 셨던 교감 선생님은 바로 다른 학교로 갔다. 우리에게는 그 학교에서 자기를 찾아와 도와달라 했다고 했다. 그 학교에서는 교감선생님이 일하고 싶다고 몇 번을 찾아왔다고 했다. 진실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더 몇 사람을 떠나보냈다.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갑자기 주인을 잃어버렸다. 언젠가 오실 분의 물건들이라 정말 필요한 것만 조심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매일 먹는 밥그릇이며 숟가락까지. 갑자기 주인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었다. 선임 선생님이 계실 때 이 집을 일주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입으시던 옷 들. 쓰시던 물건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우리에게 위임하신 유서가 있었지만 그 물건들에 대한 결정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알 수 없었다. 고맙게도 동역자가 제안했다.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자고. 아마 가장 그분의 뜻에 합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선임선생님의 필체가 남아있는 성경





그후로 다른 사람들이 내 물건을 정리해야 할 때 어떤 의미가 될까 생각하게 된다. 선임선생님의 아드님이 오셔서 중요한 유품들을 정리했고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반드시 다시 올 거라는 강한 확신이 있으셨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유서를 작성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간절히 바라셨던 이 곳에 그분은 없고 우리는 있다. 내 것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은 내 것일 때가 많다. 시간도, 물건도, 사람도...내 것(혹은 내 것 같은 것)도 언젠가 내 것이 아니게 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배우고 시작하게 되었다.


임신하고 언어 공부를 다니며 큰 길에서 30분이나 비탈을 걸어 내려가야 하는 곳이라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해 이사를 결정했다. 끝과 시작이 공존한 우리의 첫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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