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을 구하게 된 건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집을 구한다는 걸 아는 언니가 브로커(알음알음 번호를 구해야 하는 부동산 중개인)도 소개해주시고 집도 같이 보러 다녀주셨다.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했는지 모른다. 그 날 집을 보러
브로커를 따라갔는데 도착한 집이 바로 그 집이었다. 아이를 안고 업고 재우며 창문으로 보던 회색 집. 우리 집에서 매일 보던 그 집이었다.
친근함 때문이었을까. 아주 큰 세퍼트와 더 무섭게 짖어대는 제페니즈 스피츠가 있었는데도 그 집으로 결정했다. 지은지가 2년이 넘어가고 있었는데 외국인에게 집을 주려고 비워놓은 1층이었는데 이게 함정이었다. 아끼는 집에 예민하신 주인 아주머니는 주로 마당 텃밭에서 시간을 보내셨는데 커튼이 열려있을 때 보셨는지 집 안에 신발장을 놓는 일에도 잔소리를 하셨다. 그 텃밭 바로 옆 안방에는 낮에도 밤에도 커튼을 열어둘수가 없었다. 1층은 참 어렵다.
삼촌과 함께 살게 되었다. 육아에 있어서 안아줄 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된다. 더구나 조카를 너무 예뻐했던 삼촌 카메라에는 '땀뚄'하며 쫓아다니는 조카 사진들로 가득했다. 에너지 넘치는 큰 애는 남자 둘이 번갈아 안아 그나마 나의 손목에 피로를 가벼이 해 주었다. 육아 공동체로 서로를 의지했고 기쁨도 함께 누렸다. 그 때문에 지금도 큰 애는 삼촌과 기탄없이 지낸다.
삼촌은 봉사단원으로 나와있던 지금의 동서를 만났고 둘 다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아했는데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 일이 가능했던 건 시부모님의 적극적인 참여였고 그렇게 가족 모두 여기서 지내고 있다. 시부모님과 삼촌네는 카페를 운영하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하지만 우리는 가족공동체이다. 덕분에 아이들은 이곳을 '외국'으로 여기지 않는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네가 있는 집이다. 그 안정감으로 얻는 유익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서방님' 말하자면 남편의 동생을 삼촌으로 부르는 이유는 삼촌의 부탁때문이다. 삼촌이 결혼하시기 전에는 '도련님'이라 불렀었다. 이름을 부를수도 없고 다른 방법이 없으니. 결혼 하신 후에 "이제 서방님이라 불러야겠네요" 했더니 "제발 형수님 그건 좀 참아주세요 하신다." 그래서 그냥 '삼촌'이 되셨다.
![](https://blog.kakaocdn.net/dn/pKW05/btqDecuW8hQ/LHOZkRxPVSMntH8I9Byppk/img.jpg)
그 일들을 위해 삼촌이 잠시 한국으로 떠났고 우리도 그 집을 떠났다.
아장 아장 걷던 큰 애가 마당을 다니다가 발을 헛 딛어 넘어졌다. 다음날에도 손이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엑스레이를 찍자고 했다. 가는 손목에 실금이 갔고 반기브스를 했다. 앞으로도 몇차례나 있을 일의 시작이었다. 넘어지기만 하면 뼈가 다치는 무시무시한 일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