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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수다

나도 마찬가지야.


남사친에서 남친이 되던 날엔 서로의 오해가 있었지만 둘 다 싫지 않았던지 우리는 다음 날 만나기로 했다. 덕수궁 까지 가서야 들은 말은 첫 연애가 시작되나 하는 설레임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나는 사실 결혼 할 생각이 없는 사람이야."내 대답은 "나도 마찬가지야.." 였다. 우리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나도 마찬가지 였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겁이 많은 나는 아이를 낳는 고통을 감당할 능력이 내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처럼 고생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24시간을 아빠와 교대로 일하시고 아빠가 신문보며 쉬는 시간에도 밥하고 청소하고 세탁기를 돌리셨다. 열 살 부터 외할머니를 도와 아궁이에 불 피워 밥하고 동생들 돌보느라 힘들었던 엄마는 딸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는 것을 인생의 원칙으로 삼으셨고 철저히 지키셨다.

그 마음을 헤아려서 정말이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않는 삶을 살았고 세 아이를 낳고 사는 나를 보며 엄마는 엄마의 원칙을 지킨것을 매우 뿌듯해 하시지만 덕분에 온 가족을 수발드느라 벅차게 일하시며 싱크대앞에 서 계신 엄마의 뒷모습만 떠오르면 마음이 저릿하다.

엄마의 고생은 이 정도에 그쳤던 것이 아니다. 아빠가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서러운 상황에 아로 새겨진 아픈 말들이 있다. 당연히 가져가고 당연히 주지 않는 당당함 앞에, 오이 소박이 김치뚜껑을 덮어버리며 내지르던 소리에 기가 질려, 하나를 업고 하나를 걸리고 찾아가 점심도 못 먹고 먹은 그릇 설거지만 하고 돌아오던 엄마의 뒷모습이 그려진다. 왜 그랬냐는 나의 핀잔에 돌아온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는 말은 물려받은 삶이라는 것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는 물려받기 싫었다. 딸에게 밖에 터 놓을 곳 없는 서러움, 아내라는 이름, 엄마라는 이름, 며느리라는 이름을 물려받기 싫었다. 그 모든 이름이 나에게는 고생으로 보였다. 젊고 예뻤던 엄마를 늙어가게 하는 고생들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건강했다. 나는 약했다. 그래도 엄마는 부지런했다. 나는 게을렀다. 그래도 엄마는 자주 웃었다. 나는 자주 울었다. 나는 엄마처럼 될 자신이 없다고 했다. 엄마는 다 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나중에 남편에게 물었다. 왜 달달한 말을 해야 하는 순간에 그런 말을 했냐고. 진심이었단다. 늘 그런 생각을 했단다. 나도 진심이었다. 늘 그렇게 생각했다. 맞은편에서 놀고 있는 어린 딸의 얼굴을 본다. 이 아이는 커서 어떤 눈으로 나의 삶을 바라볼까. 우리의 삶을 무엇이라고 써내려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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