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는 게 부끄럽지 않은 직업이다. 가난하면 칭찬도 받고 아주 가끔은 도움도 받는다. 구멍난 신발을 사진으로 찍었던 적이 있다. 부끄러워야 하는데 자긍심도 생기는 이상한 마음이었다. 그게 집착의 모습을 갖추었나 보다.
버려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하고 좋은 것을 사서 오래쓰자 마음먹어도 좋은 것은 사지 못한다. 좋은 것들은 누가 준 것이다. 짐을 싸서 멀리 오는데 선택된 것들은 대부분 누가 준 것이었다.
디아도코스가 말하길 "자신에게 속하지 않음"이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이며 진정한 본질이다.
나에게 속하지 않기 위해 나를 알아야 한다. 나를 알아야 내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있다. 나를 아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손을 따뜻하게 잡고 계신 주님을 만난다. 그 분의 손을 잡고 가는 길에서 만나는 나는 '자유로운 나'이다.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는 나를 바라볼 수 있는 나이다.
그 나는 여전히 나이지만 내가 알던 나는 아니다. 나를 만드신 분이 은혜로 만든 옷을 입혀 주신 나다. 내속에 내가 원하는지 알지도 못했던 나. 기계소리에는 반응하지 않는 나다. 주님의 목소리만 알아듣는 나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또 기계소리를 내고 있다. 가난하다는 자긍심에 집착하고 있다. 가난을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그래야 자긍심) 본의 아니게 주체가 되어 속이 상한다. 그런데 같은 글을 읽어도 '가난' 이라고 읽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내 기계가 '가난'이라는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생각도 그것을 붙들 수 없으며, 시간도 그것을 건드릴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이 모든 생각과 모든 시간과 우리의 생사를 포함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알았다" 했을 때의 "너" 즉 태어나기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아셨다는 우리자신이다.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유에 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
침묵수업 p101
수치를 느껴야 하는 일을 쓰고 알리고. 참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내가 나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힘이 나로 글을 쓰지 못하게 하는 힘이다. 그 힘을 이기는 아주 작은 틈새가 글을 쓰게 한다.
내가 가난하다는 것이 부끄럽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생각이 가난을 붙들지도 않고 그저 그분처럼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고 말하면서도 부자의 밥상에서 언행이 자유로운. 나는 정말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기를 원하니. 내 안에 갇혀 살고 싶지 않다.
'가난'을 노래하지 않고 '사랑'을 노래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시는 손짓에 내 영혼이 반응하려고 한다. 창 밖의 부요함으로 나를 소생케 하시며 온 세상의 주인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한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나를 일으키시니 나는 일어난다.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을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지 않고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가진 것에 감사하는 나로 은과 정금과 진주보다 귀한 것을 가진 나로 살기를 원하시는..나의 실수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나를 다시 살리시는 당신의 사랑을 노래하고 노래하고 노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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