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겨울 남편이 안식년에 공부를 하기로 결정한다. 결정된 일을 말하기까지 마음이 죄인이다. 일 년동안 떠나야 한다는 말을 해야 해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있는다. 이 곳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단다. 외국인들은 언젠가 떠난다고. 그렇지만 일 년 후엔 돌아오는데. 우리는 꼭 돌아올건데.
네팔 엄마. 그래 나에게도 네팔엄마가 있었다. 내가 부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나보고 내가 너의 네팔 엄마라고 했다. 물론 나는 엄마라 부르지 않았다.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고모라고 불렀다. 아침 일찍 집에 와 차를 마시고 가고. 내 서툰 네팔어를 고쳐주며 잘한다고 칭찬해 주었다.
미루고 미루다 이야기를 꺼낸 날이었다. 여느 때 처럼 둥그렇게 모여 앉는데. 누군가 그랬다. 우리를 부르고 기다리자고. 나는 가까운 곳에서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등 돌리고 앉아있었다. 그 때 들었던 푸푸의 찢어지는 목소리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하다. 이제 간다는 사람을 왜 부르냐고. 쓰면서 느껴진다. 서운함이 섞인 배신감, 절망같은 분노, 짜증과 울분. 거친 속내가 내 등을 후려쳤다.
이 땅의 문화와 종교를 서로 떼어낼 수 없다. 화장문화는 대표적으로 가장 힌두적이다. 그래서 많은 기독교인들은 매장을 원한다.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푸푸는 교회가 땅을 사기를 원했다. 그 땅에 교회를 짓고 그 땅 한 켠에 묻히고 싶어했다. 자주 이야기했고 정말 간절히 바랬다. 물론 우리는 당연히 그럴 돈이 없었다.
다음날. 푸푸는 우리가족 모두를 집으로 초대했다. 헤어질 때는 밥을 꼭 먹여 보내는 문화대로. 몇몇 성도들을 부르고 밥을 차려놓았다. 소홀하지 않았다. 원래 내가 아는 푸푸였다. 모든 것이 다 원래대로 였지만 나만 바뀌었다.
내가 나를 설득했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을 푸푸의 매몰찬 목소리로 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서운해서 그렇다. 그만큼 우리를 믿어준거다. 함께한 시간이 그렇게 좋았다는 거다. 자기도 속상할텐데 저렇게 우리를 위해 밥을 해주다니 감사할 뿐이지. 그렇게 나는 안식년을 떠났다.
한국에 와서 송금 관련 은행업무를 보아야 했다. 은행 2층은 처음 가봤다. 질문 끝에 이해가능하고 타당한 이유로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아주 공손하고 예의바르게 들었다. 문을 닫고 나와 계단을 내려오다 눈물이 터졌다. CCTV가 있을테지만 어찌할 수가 없었다. 눈물 콧물을 막을 수 없고 복받치는 울음소리도 터져나왔다. 마치 이 대출을 받지 못해 부모님 병원비를 낼 수 없는 사람처럼 울었다.
이별이 없었다면, 이별을 고할 일이 없었다면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일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이별을 고했다가 받았던 무서운 목소리가 이별을 고해도 서운하지 않을만큼만 사람들과 지내게 하는 이유가 될 때가 있다. 문화의 차이, 언어의 한계도 있었겠지만 많이 아픈 일이었다.
이별 자체가 두렵다기 보다는 이별을 고하는 과정에서 관계가 깨져 버리는 것이 두렵다. 몸이 멀어지고 연락할 수 있는 횟수가 줄어들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지 못하는 시간들이 당연해지는 것 때문에 화를 내거나 외면당할것이 두렵다.
그게 왜 그렇게 두려울까. 감정의 표현일 뿐인데. 나의 두려움을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만 감정을 표현하라고 모두에게 알릴 수도 없는데. 그게 왜 그렇게 아팠을까. 당신들과 헤어지는 것이 나도 너무 아프다고. 나도 너무 많이 슬프다고. 우리 좋았던 시간들이 나도 너무 그립다고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그 분노 앞에 놀라서 내 것은 저 뒤로 안보이는 곳에 던져버렸나보다. 다음에 그런 일이 생기면 나는 또 내것을 더 멀리 던져버리게 될 것 같아서이다. 얼마나 멀리 던져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찾아나서야 할 시간이 되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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