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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가 흐르게 하며

속아서


물건을 산 적이 있다. 고등학생 때 학교 앞 판촉에 넘어가 내가 도저히 풀 수 없는 어려운 문제지를 엄마를 졸라 샀다. 정말 첫 장부터 손도 댈 수 없을 만큼 어려운 문제지였다. 일년을 구독했는데 비닐도 뜯지 않고 쌓여가는 문제지는 다 야근을 해가며 일하는 부모님의 피 같은 돈이었다.  


대학생 때도 학교 앞 봉고차에 타서 역기로 써도 될 만큼 무거운 경제학사전을 샀다. 역시 한 장도 읽지 않고 그대로 비싼 쓰레기가 되었다. 비닐도 뜯지 않은 문제지와 한 장도 펼치지 않은 사전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일까? 그 물건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공부를 잘 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실제로 공부를 하지 않을 나에게 속은 것일까? 나에게든 누구에게든 속아서 쓸모가 없는 물건을 내가 벌지 않은 돈을 주고 샀다.


속임을 당할까 겁이 나고 속임을 당했다고 깨달아지면 너무나 속이 상하고 나를 속이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다. 그래서 속아주기가 싫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라 특히 큰 아들은 한 번 거짓말을 했다가 정말 호되게 혼이 났다. 지금도 그 때 일을 가끔 이야기한다.


어떤 어른이 되면 나는 속아줄 수 있을까. 아니 얼마나 사랑하면 속아주게 될까.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속이는 글이 떠오른다.


추위에 얼굴이 파래져가지고
나한테 꼭 할 말이 있다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그러더군.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돼요.'
생뚱맞은 말에 나는 몹시 당황했네.
그래서 그만 차갑게
툭 던지고 말았지.
' 학생 그게 뭔 소린가.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하나?'
...
그 아이는 아마 내 책을 읽고
나를 좋아하게 됐겠지.
그런데 한 존재에 깊이 의지하면
'이 사람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더럭 겁이 나거든.
어렸을때 엄마와 애착이 심해지면
치맛자락 붙잡고 그러잖아.
'엄마 나 두고 죽으면 안돼'
...
어머니가 내게 해줬던 것처럼
'걱정 마. 나 절대로 안 죽는다.'
그러면 그 아이는 얼었던
두 손을 비비며 너무 기뻐하겠지.
그 순간 주차장의 차들은
팡파르처럼 경적을 울릴거야.
죽음을 이긴 승리의
트럼펫이 울리는 거야.
그러면 그 춥고 멋없는
콘크리트 차고는
초원으로 변하고
꽃들이 사방에서
피어나겠지.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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