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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가 흐르게 하며

100만원 짜리 선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미 잘 그려서도 아니었다. 그저 미술 시간에 스케치한 숙제로 A+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가 잘 할 수 있는 걸 드디어 찾았나 싶었다.


엄마는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상담을 하셨고 미술 시키려면 100만원도 넘게 든다는 말과 함께 나중에 커서 돈 벌어서 공부하라고 하셨다.


그 후 혼자서라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것을 보면 여고생에게 스쳐지나간 얕은 바램이었을 것이다. 거절 당하는 순간. 그 이유가 돈이 되는 순간. 그림 그리는 일은 비싸고 나는 할 수 없는 일이 되어버린 것은 사실이다.


나이 마흔 셋에 코로나 시국에 '사이버 대학'에 편입했다.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자격증 하나를 더 따기 위해 듣고 싶지 않은 과목을 들어야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과를 둘러보게 되었다.


나는 하지 못한 미술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물감이 묻은 앞치마를 입고 비싼 미술재료를 사러 가는 친구와 학교 앞 화방에도 몇 번 들렀었다. 물감 냄새 가득한 작업실에 들어갈 때마다 경외감이 들었다.


온라인으로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사이버대학에서 '회화'를 만날 거라는 예상치 못했다. 바로 수강신청을 눌렀다. 자격증을 포기하고 마지막 학기를 대부분 그리기로 채웠다.



과제 평가에서 교수님께 더 할 수 없이 귀한 칭찬을 받았고 점수도 A+을 주셨다. 고등학교 졸업 후 수채화 붓을 든 적이 없었으니 잘 그릴 수가 없다. 성실함을 높이 평가해 주신 것이지만 오랜동안 접혀 있던 그림에 대한 구겨진 마음을 펴 주시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격려였다.


왜 그리 오랜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종이와 연필만 있어도 그릴 수 있는 것을. 교수님의 격려로 그림과 나 사이에 그어진 100만원이라는 선위에 무늬를 그려넣을 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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