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내가 흐르게 하며

집구석.


아이들이 다시 온라인 수업을 하고 몸이 아프다 보니 집이 엉망진창이다. 그야말로 집구석이다. 한숨쉬듯이 “아. 이 집구석 좀 봐.” 했더니 옆에서 남편은 “왜? 뭐가?” 한다. 평소에는 그냥 지나치던 곳이 몸이 피곤하고 예민할 때 참을 수 없이 지저분해 보인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는데 문득 사람은 자기가 규칙을 부여하고 그 규칙이 지켜지는 곳에 애정을 가지게 된다는 말이 떠올랐다. 애정을 느끼는 공간은 어디인가? 라는 생각으로 집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없다. 모든 것이 되는대로 놓여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당장 이 집을 떠나야 하면 무엇이 아쉬울까? 이 집 안에 물건들에는 아쉬움이 없다. 다만 이 집에서 바라보는 뒷집 아보카도 나무와 그 뒷편 산으로 지는 저녁 노을, 창문 밖 히말라야 풍경이 그리울 것이다.

언젠가 이사를 하고 한 달 쯤 지난 집에 지인이 온 적이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이사 온 집이야? 이삿짐 싸는 집이야?” 라고 물었다. 그 분은 본능적으로 알았던 거 같다. 애정을 받지 못하는 집이라는 것을. 어렸을 때 부터 중년의 나이에 오기까지 나는 정말 많은 이사를 다녔다. 그게 이유가 될까? 엄마가 애정을 두지 않는 집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어떤 마음일까? 아니 반대로 엄마의 사랑이 깃든 공간에 사는 아이들은 어떨까? 남편은 엄마가 애정하는 집에 과자부스러기도 흘리지 못했기에 집에 대한 애정이 나와 비슷하다. 엄마가 집에 대한 큰 애정이 없어서 우리 아이들이 잔소리 듣지 않는 걸 다행이라 여길까?

‘너는 기본적으로 에너지도 애정도 없는 사람이잖아’ 라는 공격이 훅 들어온다. 아니! 나는 애정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너무 많은 것을 고려하고 분란을 피하려다 보니 표현 되어지는 것이 적은 것 뿐이다. 어릴 때 부터 같이 써온 침대를 큰애는 따로 쓰고 싶어하고 둘째는 같이 쓰고 싶어하고 남편은 이사 할 때 짐이 늘어나는 걸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 집도 우리 집이 아니니 계약기간이 끝나면 이사를 가야 한다. 짐을 직접 옮겨야 하니 그것도 맞는 말이다. 지금도 남편은 바닥에 매트리스만 두고 잔다.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 나 혼자 규칙을 정해주고 애정을 가져도 되는 공간은? 왜 그런 곳이 없나? 여기가 전적으로 나의 문제다. 내가 그곳에 규칙을 정해도 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는 것이다. 나름의 규칙은 부여되어 있겠지만 내가 애정을 가지고 부여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애정은 어디로 향해있나? 남편이 아이들을 다 데리고 나간 조용한 이 시간에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짬이 나면 읽고 시간이 나면 쓴다. 나의 애정은 읽고 쓰기로 향해 있다.

집을 집구석이 아닌 집으로 대우하는 일에도 애정을 쏟아야 한다. 나의 추억속에서 잘라내고 싶은 배경이 아닌 아름다운 배경으로 함께 해 주기를 바라며. 그 과정에서 중년이 되어서야 초록이들을 죽이지 않게 된 내가 어떻게 이렇게 식물을 잘 키우냐는 소리를 들은 것과 결이 비슷할 것 같은 무언가를 나는 배워야 한다.

'시내가 흐르게 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라함에 대하여  (0) 2022.04.30
지나가버린 꿈  (0) 2022.04.01
우울할 때는 달다구리.  (2) 2022.01.11
구정물도 햇빛을 만나면 반짝인다.  (2) 2022.01.02
기계가 무섭지 않다.  (0) 2021.1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