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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 깊은 수다

애초에 왜 나는 노트를 쓰는 걸까?

나는 말의 속도가 느리다. 천천히 말하는 것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천천히 말해도 실수를 온전히 피할 수는 없다. 말은 일단 내 입에서 떠나면 상대방의 상황과 형편에 가서 닿아 새로운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허니 말을 하는 것은 큰 부담이 된다.

내 감정이 내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늘 썼다. 교실에서도 집에서도 썼다. 그날도 노트 한 권을 들고 운동장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썼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내가 알아주면 되니까...'하며 한 바닥을 끄적이고 교실로 돌아갔다.

노트는 써내려가는 동안 나를 가로막지 않아 쓴다. 노트는 나를 불편해하지 않아 쓴다. 노트는 나를 판단하지 않아 쓴다. 노트는 나를 받아주기 때문에 쓴다. 노트는 비밀을 지키기 때문에 쓴다. 노트는 언제든지 나를 반겨준다. 노트는 내 의도를 오해하지 않아 쓴다. 노트는 핀잔을 주지 않기 때문에 쓴다. 노트는 그 때의 나를 그대로 담고 있다 다시 돌려주기 때문에 쓴다. 노트는 늘 그곳에 있어줄 것이 때문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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