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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는 것에 대하여

적어야 산다.




불안이랑은 낯설지 않은 사이지만 한 5년 만에 만난 쓰나미가 지나가 이제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남의 한마디가 도화선이 되어 눌러왔던 불안이 폭파되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악몽은 더 이상은 눌러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경고를 날리기 시작했다. 눈만 감으면 불안이 형체를 입고 사납게 덤벼들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고 가슴이 답답하다. 숨을 크게 몰아쉬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그날도 새벽 3시에 눈이 떠졌다. 다시 눈을 감으려니 덥쳐올 불안의 영상들이 눈에 선하다. 저 속에서부터 짜증이 일어나 박차고 마루로 나왔다. 그리고 노트를 열어 외면하던 감정들을 적어내려갔다. 적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적어야 산다는 것을 안다. 그 사이 글쓰기에 대한 책을 두권이나 읽었다. 그런데도 쓰지를 않았다. 그런 것을 뭐라 표현할까?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집에 있는 약을 먹으며 버티다가 어쩔 도리가 없어져서야 응급실에 도착한 느낌.


쓰지 않으며 글쓰기에 대한 책을 읽고 몸의 신호를 외면하며 '몸은 기억한다'를 읽었다. 힘들어 하는 친구에게는 몸과 마음이 하나라며 몸의 신호에 귀를 기울여주라고 말 했지만 나는 전혀 그러지 않고 있었다. 일기를 쓰라고 권면하면서 나는 쓰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악몽은 불안의 앞잡이라기 보다 미련하게 굴지 말고 아픈 곳을 보이라는 의사의 경고라고 봐야겠다. 아무도 읽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미친듯이 4장을 적어내려가니 속이 풀린다. 인애가 넘치는 부드러운 의사의 손을 잡게 되었다. 살 것 같다. 이걸 알면서 왜 그런 시간을 보내니? 알면서도 왜 쓰지를 못하니? 나에게 묻는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남편이 큰 애한테 묻는다. 네 안에 예수님께 치료받고 싶은 소경, 절음발이와 같은 장애는 무엇이냐고. 아이는 잠깐 시간을 달라하고 둘째는 역시 모르겠단다. 생각을 마친 큰 애 입에서 그 두 글자가 나왔다.







"불안?"







죄책감을 동반한 불안의 폭풍우가 귓가에 숨을 내쉬었다. 쓰기 전에 들었다면 쓰나미에 폭파되는 원전이 되었을 터이지만 다행히 나는 쓴 후였다. 그냥 말 할 수 있었다. "엄마도 그건데"


적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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